소외疎外란 말이 유행어처럼 쓰이어지고 있다. 그 어원을 라틴어에서
찾아보면, 타인화他人化 현상을 뜻한다고 한다. 즉 한 인간을 타인을 가지고도
대체할 수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인간이 스스로의 생활향상을 위해 만들고 기록한 기계나, 이념이나,
제도나, 조직이 거꾸로 인간 생활을 지배하기에 이르러 도리어 인간을
그 도구나 예속물로 만들어 버리려는 인간현상을 소외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나는 저러한 인간의 정신이나 정서와 그 과학과 기술의 균형 상실에서
오는 소외현상 보다, 인간이 근원적 차원에서 지닌 소외의식을 좀 살펴볼까 한다.
시인 폴 끌로델은 그의 작품 <황금의 머리>의 머리말에서, “나는 여기 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허청대고 있다. 아지 못할 소외속의 소외자, 나의 마음은 암울에
차있다. 내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또 이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무엇을 말할 것인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 힘없이 드리우고 있는 이 손을 무엇에
쓰랴. 마치 꿈속에서처럼 움직이고 있는 이 발을 무엇에 쓰랴.” 라고 적어
놓고 있다. 신비의 시인, 은총恩寵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그의 실존적 체험의
고백이 저 정도일진데, 우리도 한번 자기 자신을 정직과 성실로 살펴 볼 때
저보다 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무심한 일상 속에서 겪는 경험만으로도 가끔 거울을 들여다보다가
그 거울 속에 비추인 자기 얼굴이 낯설어지는 경우가 있으며, 기계 톱니바퀴처럼
휘말려 들어가다가 어쩌다 멈춰 자기 생활을 돌아 볼 제 그 삶의 맹목성에
놀라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병이나 죽음에 다다를 때 자기가 이제까지 피땀으로
이룩한 생활이나,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는 물심物心의 소유가 모두 다 허망한
것으로 여기게 되기도 한다. 실상 인간의 삶을 인간의 지능으로만 따져 소위
그 신비성을 무無로 돌릴 때, 인간은 그 삶의 맹목감 속에서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또 거기에 따른 불안을 피할 길이 없다. 이 불안이라는 말 역시 라틴어의
어원으로는 원인모를 가슴앓이로서 그 불명상태가 불안의 본질이라 하겠다.
그래서 불안을 한갓 개인적 괴로움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불안의 본질을 포착하지 못한 천박한 생각이다. 즉 불안이 어떤 개인적인
근심이나 걱정일 때 거기에는 자기 위안이나 희망이 따르기 마련이다.
가령 어떤 횡액을 당하면 또 그와 반대의 횡재도 꿈꿔 보고, 또 암 같은
중병환자가 체념을 입 담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 하는 희망을 갖는
등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적 불안은 저러한 개인적인 것보다 존재
자체의 맹목감에서 오는 보편적인 것이다.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그린
미드가르도의 그림, 지평선 저쪽의 땅덩이를 큰 뱀이 휘감고 있고, 그 뱀의
또아리 속에 우리 인간이 감기어 죄어 있는 그림을 볼 때, 우리는 어떤
흉물스러운 힘 속에 저도 모르게 칭칭 감겨 있으면서도 멋도 모르고
살고 있구나 하는 공포가 저절로 일어난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 소외와
불안을 릴케는 다음과 같이 시로써 형상화해 놓고 있다.
우리는 일체가 될 수 없다.
철새가 그렇듯이
우리들은 깨우치고 있지 않다.
뒤에 처지고 늦어 있음을.
우리들은 바람에 억지로 몸을 맞기고
차가운 연못 위에 떨어지려 한다.
개화와 조락을 동시에 우리는 의식한다.
그리고 어디선가 사자는 아직 걸으며
그들은 당당한 동안 무력을 모른다.
즉 우리 인간은 철새처럼 고향도 피안彼岸도 없이 방황하고 있으며,
더욱이 그 속에서도 본능이 쇠퇴될 철새처럼, 계절에 뒤져있는 것도 모르고
날고 있다. 그래서 찬바람처럼 우리를 거부하고 괴롭히는 소외와 불안
속에 떨면서, 안식처를 구해보아도 얼어붙은 연못처럼 나래를 펼 곳이 없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동물인 사자는 오히려 자기의 무력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현대인간들에게 저러한 인간존재의 불안과 소외, 즉 실존적 자각이
일게 되었는가. 여기서 단적으로 그 결론만을 이야기하면 절대적 진리,
즉 신神의 상실과 거역에서 연유한다. 즉 인간은 신을 잃음으로써
고아가 되고, 고향 상실자가 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정황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집의 형제들>에서
이반이라는 무신론적 인물로 하여금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에게 불안을 느낀다”고 하고, 사르트르는 그의 희곡
<잠겨진 문>에서 오로지 충돌하고 괴로워하고 권력과 그 물욕을 위해서
맹목적으로 싸우는 허무적 인간상을 제시하게 된다. 흔히 요즘 인간회복이
모든 이에게서 입 담아지지만, 필경은 저 성서의 ‘탕아의 귀가歸家’가
이루어져 신령한 것에 대한 외경심을 회복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소외나
불안감은 치유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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