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문학사의 3대 거장(巨匠)이 나란히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시 '국화 옆에서'의 시인 서정주, 시 '나그네'의 시인 박목월, 소설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이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문단에서 재조명된다. 서정주 시인 전집(20권)이 새로운 편집을 거쳐 나오고, 박목월 시인의 육필 시집도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9월엔 황순원문학제도 열린다. 세 문호(文豪)의 제자들이 저마다 회상하는 스승의 삶과 문학에 대해 들어봤다.
◇서정주의 제자 문정희(한국시인협회장)
서정주 시인이 동국대 국문과 교수로 재직할 때 그분에게서 시를 배웠다. 선생님은 말년에 스위스에서 사온 목동의 뿔피리를 집에 뒀다. 어느 날 선생님 댁에 갔더니 간밤에 도둑이 들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선생님이 뿔피리를 냅다 불자 도둑이 도망쳤다는 것이다. 놀랐으면서도 절로 웃음이 났다. 역시 시인이 아니면 어떻게 뿔피리로 도둑을 쫓을 생각을 했겠는가. 선생님은 향(香)을 수집했다. 불가(佛家)에서 피우는 백단향(白檀香)이나 오랫동안 바닷물 속에 담가뒀다는 침향(沈香)을 좋아했다. 다양한 지팡이도 모았다. 향 냄새를 맡으며 영원(永遠)과 미래를 떠올린 시인이었지만, 동시에 지팡이를 짚고 지상을 돌아다닌 시인이기도 했다. 선생님의 시 세계가 천·지·인(天·地·人)으로 꾸며진 것은 그분의 삶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스승이 내게 주신 지팡이를 아직 지니고 있다. 그 지팡이를 보며 곧 시 한 편을 쓰겠다.
◇박목월의 제자 신달자(시인)
나는 1964년 '여상(女像)'지를 통해 시인으로 데뷔했다. 그러나 결혼해서 첫 아이를 낳은 뒤 묘한 '상실감'에 시달려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았다. 밤마다 집 안의 모든 서랍을 열고 닫고 다시 열곤 했다. 둘째 아이를 밴 뒤에도 어느 날 넋을 놓은 채 종로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그때 우연히 박목월 선생님을 만났다. 내게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선생님이 "차나 한잔 하자"며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선생님이 "다시 글을 쓰라"고 하자 내 가슴에 전율이 일었다. 잃어버렸던 문학의 열정이 되살아났다. 그 이후 나는 매주 일요일마다 선생님 댁에 가서 시를 다시 공부했다. 선생님은 밤새 써 갖고 온 시를 혹평했다. 선생님 앞에서 너무 오래 무릎을 꿇었다가 다리가 저려 겨우 걸음을 내딛기도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나는 1972년 선생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으로 새롭게 등단했다. 선생님의 시 중에 '크고 부드러운 손'이란 작품이 있다. 선생님이야말로 '크고 부드러운 손'이었다.
◇황순원의 제자 김형경(소설가)
황순원 선생님은 경희대 국문과 교수를 지냈다. 국문과 78학번이었던 나는 4학년 때 선생님 강의를 처음 들었다. 이미 연로하셔서 명예교수가 된 선생님이 4학년에게만 소설 이론과 창작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설 습작을 써내면 선생님이 일일이 읽고 품평했다. 한 친구가 소설 속에서 말이 잘 통하지 않는 여자의 이름을 '우이'라고 지었다. 그 친구는 별생각 없이 지었을 텐데 선생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여자 이름이 '우이독경(牛耳讀經)'에서 따온 것이냐?"고 물었다. 그땐 웃음이 나왔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선생님이 글을 깊이 생각해서 읽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선생님은 "작품은 자기만의 생명이 있으니, 발표하고 나서 누가 뭐라고 평을 하든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내가 첫 장편을 내고 나서야 그 말뜻을 제대로 알게 됐다. 선생님은 "색을 많이 쓴다고 좋은 화가는 아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 언어로 멋을 부리거나 상큼한 단어를 찾으려는 치기(稚氣) 어린 습관을 버렸다. 정확한 묘사에만 집중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