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봄 / 윤오영

윤소천 2015. 3. 22. 09:25

 

 

 

 

 

창에 드는 볕이 어느덧 봄이다. 봄은 맑고 고요한 것, 비원의

가을을 걸으며 낙엽을 쥐어본 것이 작년이란 말인가. 나는 툇마루에서

봄볕을 쪼이며 비원의 가을을 연상한다. 가을이 가고 봄이 온 것은

아니다. 가을 위에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온 것이다. 그러기에 지나간 가을은

해가 멀어갈수록 아득하게 호수처럼 깊어 있고, 오는 봄은 해가

거듭될수록 쌓이고 쌓여 더욱 부풀어 가지 않는가. 나무는 해를 거듭하면

연륜이 하나씩 늘어간다. 그 연륜을 보면 지나간 봄과 가을이 하나도

빠지지 않고 둘레에 남아 금을 긋고 있다. 가을과 봄은 가도 그들이

찍어 놓고 자취는 가시지 않고 기록되어 있다.

 

사람도 힌 터럭이 하나하나 늘어감에 따라 봄과 가을이 터럭에

쌓이고 쌓여 느낌이 커 간다. 꽃을 보고 반기는 소녀의 봄은 꽃뿐이지만,

꽃을 캐는 소녀를 아울러 봄으로 느끼는 봄은 꽃과 소녀들이다.

사랑을 노래하는 청춘의 봄은 화려하고 찬란한 봄이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느끼는 봄은 인생의 끝없는 봄이다. 누가 봄을 젊은이의 것이요,

 늙은이의 것이 아니라 하던가. 젊은이의 봄은 기쁨으로 차있는 홑겹의 봄이지만

늙은이의 봄은 기쁨과 슬픔을 아울러 지닌 겹겹의 봄이다. 과거란 귀중한

재산, 과거라는 재산이 호수에 가득찬 물결같이 고이고 고여서 오늘을 이루고

있는 것, 그러므로 물이 많을수록 호수가 아름답고

과거가 길수록 오늘이 큰 것이다.

 

늙어서 봄을 맞으며 봄을 앞으로 많이 못 볼까 슬퍼할 필요는 없다.

그동안 많이 가져본 봄이 하나 느는 것을 대견하게 생각할 일이다. 산에

오르거나 먼 길을 걸을 때, 십 리고 이십 리고 가서 뒤를 돌아다보고는

내가 저기를 걸어왔구나 하며, 흐뭇하고 자랑스러울 때도 있다. 그리고 돌아보는

경치가 걸어올 때보다 놀랍게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때도 있다. 다만 지나온

추억을 더듬어 한 개의 진주를 발견하지 못하고 거친 모래알만 쥐어 질때,

그것이 슬프다. 보잘 것 없는 내 과거가 항상 오늘을 슬프게 할 뿐이다.

 

뜰 앞에 한 그루 밀감나무가 서 있다. 동쪽 가지 끝에 파릇파릇 싹이

움돋기 시작한다. 굵은 가지에서도 푸른 생기가 넘쳐흐른다. 미구에 잎이 퍼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것이다. 집안 사람들의 기대가 사뭇 크다. 그러나

서쪽 가지에서는 소식이 없다. 나무의 절반은 죽은 가지다. 죽은 가지에

봄은 올리 없다. 지난 겨울에 잎이 다 떨어지고 검은 등걸만 남았을 때,

혹 죽지 아니했나 염려도 했고, 봄이 되면 살아나겠지 믿기도 했었다. 그러나

같은 나무 한 등걸에서 한 가지는 살고 한 가지는 죽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보라 추위 속에서도 한 가지는 생명을 기르며

겨울을 살아왔고, 한 가지는 그 속에서 자기를 살리지 못했던 것이다.

 

저 동쪽 가지의 씩씩하고 발랄한 생의 의지, 지난 겨울 석달 동안,

마음속으로의 안타까운 저항, 그리고 남모르는 분투와 인내! 이에 대한

무한한 경의와 찬사를 보내고 싶다. 봄이 가면 봄이 없다고 슬퍼함은

일년을 사는 곤충의 슬픔이다. 교목은 봄이 열 번 가면 열개의 봄을,

가을이 백 번 가면 백 개의 가을을 지닌다.

 

생활에 따라서는 인류 역사 억만 년의 봄이 다 내 몸에 간직된 봄이요,

생각에 따라서는 잊지 못할 뚜렷한 봄이란 또 몇 날이 못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 세상에 머물러 봄을 여러 번 보는 것이 귀한 아니라, 봄을 봄답게

느끼고 지나온 모든 봄을 회상하며 과거를 잃지 않고 되새기는 것도 우리의 생활을

풍부하게 해 줄지언정 섭섭할 것은 없다. 다만 봄은 나를 잊지 않고

몇 번이라도 찾와 세월을 깨우쳐 주었건만, 둔감과 태만이 그를 져버린 채

헛되게 늙은 것이 아쉽고 한스러워 다시 찿아주는 봄에 죄의식조차 느낀다.

그러나 이제 발버둥쳐 봐도 미칠 수 없는 일, 고요히 뜰 앞을 거닐며 지나간 봄의

가지가지 추억과 회상에 잠겨보는 것이다. 오늘 따라 주위는 말할 수 없이

고요하고 따스한 햇빛이 백금처럼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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