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물의 연혁 / 나석중

윤소천 2015. 1. 12. 08:31

 

 

 

물의 연혁

 

 

 

 

 

나의 본적은 하늘 아래 허공

내가 구름의 아들이라는 것은 잘 아실 테고요

나는 까마득한 지상을 그리워하며 살았지요

도대체 막막한 떠돌이 삶은 싫어

지상의 가장 안전한 정착지를 찾아서

‘겸손한 마음으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우리 집 가훈

누가 나더러 물이라고 빈정대고 얕잡아도 나는

그냥 웃었지요, 사실 보시다시피 나는 물이니까요

행로를 가로막는 장벽도 수없이 만났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적하지 않고

죽은 듯 먼 길 돌아서 갔지요

까마득한 낭떠러지도 새처럼 뛰어 내리고

우리 집 가훈 ‘겸손한 마음으로’

모난 돌들의 상처도 어루만지며

목마른 나무들의 목을 적셔주며 살아왔지요

아 그러나 물이라고 내 성질

부처님 가운데 토막은 아니어서

때로는 천둥 벼락을 동반, 큰물이 되어 세상의

썩어가는 오물을 쓸어내릴 때

혁명은 되지 못하고 엉뚱하게도

한숨과 눈물을 짜내기도 하였지만 그건

내 본의가 아니었다는 걸 믿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건 전혀 광풍 때문이었다는 걸 말하진 않겠습니다

아, 저 강기슭에 삽을 씻는 농부가 보이는군요

바로 저길 휘돌아가면 드디어 강의 아랫목

나의 긴 이력을 다 쓰고 한 판 살아갈 안식처

나의 본향은 하늘 아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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