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겨울 산을 보며 / 정목일

윤소천 2014. 12. 25. 19:57

 

 

 

겨울 산은 삭발승의 묵언정진(黙言精進)이다.

만년침묵 속에서 눈보라에도 꼼짝달싹 하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기까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겨울 산은 침묵 속에 죽음을 이루려 한다.영원 속에

숨을 놓아 버리려 한다. 겨울 산은 깨달음이

말이 아님을 알고 있다. 겨울 산은 오장육부를

비워내고 있다.

 

자신도 존재도 버린다. 겨울 산은 허공이

되고자 한다. 겨울 산은 침묵의 폭포수. 사정없이 절벽

위에서 뛰어 내린다. 더는 길을 찾을 수도

머뭇거릴 수도 없다. 겨울 산은 자신의 길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됨을 알고 있다. 바랄 것도 버릴 것도

없어 편안한 얼굴이다.

 

침묵 속에 진실의 길이 있다. 천년만년을 견디어

내는 건 침묵뿐이다. 만년 침묵의 일부이면 그만이다.

영원 속에 한 숨결이면 넉넉하다. 거추장스런 장식

따위는 버린 지 오래다. 절제된 문장 한 줄도 필요 없다.

수식이나 과장을 모두 떨쳐 버린 데서 오는 깨달음.

정신의 뼈와 근육을 드러내고 있다. 능선과 계곡,

원근과 굴곡으로 본연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침묵 속에는 내면으로 흐르는 말이 있다.

그러나 겨울 산은 내면의 말마저 지워 버린다.

침묵이 되고 진실과 깨달음, 그 자체가 된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스스로 알아 버린다.

겨울 산에는 근육질만 있는 게 아니다.

겨울 산은 여성의 엉덩이, 가슴의 부드러운

선들을 내놓고 있다. 눈 덮인 능선은 한없이 정결하고

부드러우나 손으로 만져 보고픈 충동을 느낀다.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용기만을 되는 것이

아니다. 삶을 지탱해주는 뼈와 근육이 있어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만년의 침묵의 뼈대. 나에겐

침묵의 정수리가 보이지 않고, 정신의 뼈가 드러나지

않는다. 눈보라 속에 모든 것을 다 떨쳐 버리고

명상의 뼈들을 드러낼 수는 없을까.

눈보라 속에 얼어붙은 겨울 산. 겨울 산은

묵상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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