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벼 / 정목일

윤소천 2015. 1. 7. 12:56

 

 

 

 

  

가장 부드럽고 유순해 보이는 벼들이 태풍과 가뭄을

견뎌내고 들판을 온통 황금빛으로 채워 놓았다. 익어가는 벼의

빛깔과 향기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으랴. 번쩍이는 금빛과는

사뭇 다른, 마음으로 맞아들여 미소 짓게 하는 온화한 빛깔.

벼는 유순한 얼굴로 무더위를 견뎌 내고, 대지를 휘감는 폭풍의

시련을 견뎌 낸다. 벼의 미소는 하늘과 기후가 내는 성숙,

완성, 깨달음의 오묘한 미소다. 벼는 위로, 충만, 환희를 안겨 주는

뿌듯한 향기로 가을들판을 채운다. 벼는 겸손과 인내에서

온 감동의 빛깔과 눈물의 향기를 지녔는지도 모르겠다.

   

가을 들판을 보면 고개 숙여 기도하고 싶다. 땅에

꿇어앉아 벼에 입을 맞추며 경배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이 들판을 황금빛으로 가득 채워 놓았는가. 이삭들을

튼실하게 알알이 여물게 하였는가. 땀에 절은 농부들의 커다란

손과 햇볕에 검게 탄 얼굴이 떠오른다.

뙤약볕을 마다하지 않고 들판에서 씨앗을 뿌리고 김을 맨

농부들의 초록빛 거룩한 손길이 느껴진다.

벼들이 사라지고 나면 겨울 들판은 텅 비어 버린다.

벼들이 사라진 들판은 긴 휴식과 침묵에 잠긴다.

논밭은 얼어붙고 찬바람이 휩쓸고 지나갈 때마다

벌거숭이 나무들은 비명을 내지른다. 

 

들판이 숨을 쉬며 힘을 비축하는 겨울이 지나면

농부들은  서둘러 논을 갈고 모판을 마련한다. 대지의 속살을

파고 뒤엎는다. 흙덩이들은 겨울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농부는 볍씨를 물에 불려 말리고 못자리에 씨를 뿌려

모를 만든다. 농부는 모를 심고 수확하는 거룩한 임무를

위임받은 사람이다. 논에 물을 넣고 날을 받아 모심기를 한다.

한 줄씩 맞춰가며 들판을 초록으로 가득 채워 놓는다.

모심기를 끝낸 논을 바라보며  농부는 자신도 한 포기 모가

됨을 느끼리라. 다시금 가을이 오면  이 모들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그 빛깔을 거두는 기쁨을 가지게 되리라.

   

봄 들판에 나가면 하늘의 말과 벼들의 숨소리가 들린다.

벼와 숨을 맞추지 않은 사람은 진실한 농부라 할 수 없다.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라며 농부는 벼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든다. 여름 들판은 벼들이 커가는 숨소리로

가득 찬다. 농부들은 논에 들어가 피를 뽑아낸다. 태풍에 넘어진

벼 포기들을 일으켜 세우고 비가 온 뒤에는 물이 잘 빠질 수

있도록 배수로를 만들어 준다. 벼들은 태풍이 지나갈 때마다

무더기로 쓰러지지만 결국은 다시 일어난다. 어울려서 힘을 내어

일어선다. 목이 타들어갈 때도, 물에 잠길 때도,

멸구에 시달리면서 밤을 지새우면서도 묵묵히 견뎌낸다.

   

7,8월이 되면 꽃술만 삐죽 드러내는 연한 노란색의

벼꽃이 핀다. 햇빛에 반짝이는 귀여운 귀고리 같다고나 할까.

농부는 가을 들판에서 익어가는 벼들을 보며 흙, 물, 태양의

온기를 느끼고 벼의 은혜를 생각한다. 인류의 젖이 되고 밥이

되는 벼! 떡이 되고 술이 되는 벼! 흥과 신바람이 되는 벼!

노래와 춤이 되는 벼! 풍요와 평화가 되는 벼! 가을 들판의

벼 앞에서라면 누구나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하리라.

벼들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으면서도 말없이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풍요와 안식을 안겨 준 후, 때가 되면 들판을 비우고 사라진다.

 

벼는 예로부터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주식물로

삼는 농작물이다. 벼는 생명 그 자체이며 생명을 키우는

위대한 모성을 지녔다. 벼야 말로 인류를 먹여 살리는

더없이 고마운 곡물이며, 생명을 주고 기른 어머니이자,

고향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평생 동안 밥을 먹고

지내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온 것인가. 벼의 삶과

일생을 생각하면, 너무도 부족하고 미숙함을 느낀다.

아, 들판을 물들이는 벼의 황금빛으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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