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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역사속 이야기] <23>승정원일기

윤소천 2014. 9. 27. 18:23

 

 

 

 

 

 

 

[역사속 이야기] <23>승정원일기

 

날씨부터 왕의 표정까지… 2억4250만 字에 담다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의 큰 줄기 속에는 크고 작은 사건들과 주연과 조연으로 구분되는 인물들이 존재한다. 큰 사건과 주연에 대해서는 모두들 잘 알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비중이 작은 사건과 인물들은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역사책에 단 한 줄로 기록된 ‘결정적 하루’ 또는 ‘결정적 인물’을 찾아내는 일은 역사를 읽는 새로운 시각을 길러준다. 이번 호는 연재의 마지막 순서로 왕의 숨결이 느껴지는 기록 《승정원일기》에 관한 이야기다. <편집실>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 담당한 승정원에서 날마다 작성한 왕정 기록지

정변·병화로 대부분 소실… 인조1년부터 288년간 기록 3243책 남아

 

대화내용 모조리 기록 ‘실록의 10배분량’… 완역하는데만 100년 예상

일별·월별·연별 정치흐름 이해 중요자료…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으면서 비서실 기능을 한 기관인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일자별로 기록한 책이다. 원래 건국 초부터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 288년간의 기록이 3243책에 2억 4250만 자로 기록되어있다. 《승정원일기》는 이러한 자료적 가치와 우수성이 확인되어 1999년 4월 9일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 왕의 비서 기관, 매일매일을 기록하다

 

조선시대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서 매일 매일의 기록을 정리한 《승정원일기》는 왕의 동선(動線)과 왕이 거처하던 궁궐 건물, 신하들과 주고받은 대화 및 왕의 기분과 건강까지 알 수 있는 기록물이다.

《승정원일기》는 현재 원본 1부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으나 초서(草書)로 기록되어 해독이 용이하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61년부터 초서로 쓰인 원본을 탈초(脫草)하여 원문을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에서는 탈초한 원문을 제공하고 있다.

 

초서로 기록된 《승정원일기》를 탈초하고, 정보화 사업을 통하여 원문을 접할 수 있게 되었지만, 한문으로 쓰인 방대한 원문은 소수의 전공 연구자만이 이용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족문화추진회(현 한국고전번역원)가 1994년부터 고종대의 《승정원일기》를 시작으로 국역 사업을 단계적으로 추진하여 현재 고종대를 비롯하여 인조대와 영조대 《승정원일기》의 국역이 일부 이루어졌다. 이 성과물은 한국고전번역원의 홈페이지에서 고전종합 DB를 통해 제공되어 《승정원일기》의 연구 활성화와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현재 《승정원일기》의 완역이 이루어질 정확한 시기는 예상할 수 없다. 번역 예정 총수가 5000여 책이 되고, 현재 500여 책이 번역된 수준을 고려하면 거의 100년의 시간이 걸릴 방대한 작업이 될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기록유산인 《승정원일기》의 번역사업을 지금이라도 앞당기려면 국학 연구 인력의 확보, 정부의 예산 지원 등이 파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승정원일기》의 국역 사업이 모두 이루어진다면 조선왕실, 나아가 조선시대사 연구에 있어서 비약적인 계기가 만들어질 것으로 확신한다.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가 건국된 후 매일 기록된 일기이므로 전량이 남아 있다면 6400여 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기록된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이나 1624년 이괄의 난과 같은 병화와 정변으로 인하여 대부분 소실되고, 인조대 이후에 기록되어 편집된 책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후에도 1744년(영조 20)과 1888년(고종 25) 등 몇 차례에 걸쳐 화재를 만나 《승정원일기》의 일부 책이 없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기록인 《춘방일기(春坊日記)》와 조정의 관보에 해당하는 <조보(朝報)>를 비롯하여 주서를 지낸 사람의 기록인 《당후일기(堂後日記)》와 지방에서까지 널리 수집한 각종 기록을 정리, 종합하여 빠진 부분을 채워 나갔다. 이 결과 1623년부터 1910년까지 288년간 매일의 《승정원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올 수 있었다.

 

 

 

편찬 전임사관 두고 ‘한 달 1책’ 편집 원칙 삼아

 

《승정원일기》는 승정원에서 작성하였다. 승정원이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기관으로 ‘은대(銀臺)’라고도 불렀다. 오늘날 청와대 비서실에 해당한다. 1820년대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담은 <동궐도>에는 인정전 동쪽 대청(臺廳)과 문서고(文書庫) 사이에 ‘은대’라는 명칭으로 승정원 건물이 표시되어 있는 것이 나타난다. 승정원에서는 왕의 지시 사항이나 명령을 정부 각 기관과 외부에 전달하는 역할과 함께 국왕에게 보고하는 각종 문서나 신하들의 건의사항을 왕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정원(政院) 또는 후원(喉院)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후’는 목구멍을 뜻하는 한자어로 승정원이 국왕의 말을 바로 대변하는 핵심기관임을 암시한다.

 

《승정원일기》의 편찬은 ‘승사(承史)’라 칭하는 승지(承旨)와 주서(注書)가 공동으로 담당하였으나 최종 기록은 주서들에게 맡겨졌다. 승지는 무관도 임명될 수 있었으나 주서는 반드시 학문과 문장이 검증된 문관을 뽑아서 임명하였다. 주서는 춘추관 기사관을 겸하여 승정원을 거친 문서나 실록 편찬에 참고했던 국내외 각종 기록을 두루 검토, 정리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의 편찬을 위하여 예문관에 봉교(奉敎) 2명, 대교(待敎) 2명, 검열(檢閱) 4명 등 8명의 한림(翰林)을 두고 이들을 전임 사관 역할을 하게 한 것처럼 《승정원일기》 편찬을 위하여 전임 사관의 역할을 맡은 주서를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주서는 승정원의 사관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주서가 사고로 인하여 업무를 수행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임시로 주서를 뽑았는데 이를 ‘가주서(假注書)’라 하였다.

 

주서가 기록한 매일의 일기는 다시 한 달 분량을 정리하여 국왕에게 올려 재가를 받는 절차를 거쳤는데, 왕에게 올리기 전 일기가 밖으로 유출되는 것은 엄격히 금지했다. 인조에서 경종대까지의 초기 기록은 두 달 또는 석 달의 기록이 한 책으로 편집된 예도 볼 수 있지만, 영조대 이후에는 한 달 분량의 일기가 1책으로 편집되는 것이 원칙으로 되었다. 분량에 따라 한 달에 2책씩 작성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대개 15일을 기준으로 하여 ‘망전(望前)’과 ‘망후(望後)’로 분류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본 내용을 기록하기 전에 승정원 벼슬아치들의 실명을 꼭 적었다. 앞부분에는 6명의 승지를 비롯하여 주서, 가주서, 사변가주서 등의 실명이 나온다. 매일 매일 기록 작성자의 실명을 꼭 적었다. 병이나 사고 등으로 출석하지 못한 상황까지 ‘병(病)’  ‘재외(在外)’  ‘식가(式暇)’ 등의 표현으로 기록하여 기록의 주체를 분명히 하였다. 기록의 실명화는 작성자에게 책임감과 함께 국가의 공식 기록에 자신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이들에게 자부심과 사명감도 아울러 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왕의 숨결까지도 담아낸 철저한 기록정신

 

《승정원일기》는 세계 최대의 역사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정치의 미세한 부분까지 정리된 방대한 기록, 빠짐없이 기록된 날씨, 1870년대 이후 대외관계에 관한 기록 등은 《승정원일기》의 가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승정원일기》는 실록 편찬에도 가장 기본적인 자료의 하나로 활용되었으며, 특히 왕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후설(喉舌·목구멍과 혀)의 직책에 있었던 승정원에서 이루어진 기록인 만큼 왕의 기분, 숨결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담았다.

 

《승정원일기》는 매일 썼기 때문에 하루의 정치, 한 달의 정치, 일 년의 정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왕의 동정을 비롯하여 정치의 주요 현안이 되는 자료나 중앙과 지방에서 올린 상소문의 원문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여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왕실 주변의 정황이 중심이 되는 만큼 국왕의 건강이나 심리상태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고, 왕이 정무를 보던 장소와 시간대별로 왕이 이동한 상황 등을 꼭 기록하여 국왕의 동선 파악이 용이하다.

 

《승정원일기》는 비서실에서 기록한 만큼 왕이 주체가 된 행사에 대한 기록이 특히 자세하다. 이것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할 때 그 특징이 잘 나타난다. 먼저 동일한 사안에 대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의 기록 분량을 비교해보자. 《숙종실록》 숙종 26년 7월 25일 기록에는 좌의정 이세백이 평안도 지역에서 문신 출신 수령을 원하는 경우가 많음을 보고한 내용이 나온다. 《숙종실록》에는 약 10행(1행은 30자)에 걸쳐 나오는데, 《승정원일기》의 같은 날 기록에 의하면 이 내용은 4면(1면은 30행, 1행은 27자) 21행에 걸쳐 있다. 《숙종실록》에서는 핵심내용만 기술한 반면, 《승정원일기》에는 왕과 이세백이 대화한 내용을 모조리 기록하고 있다. 국왕의 의견이나 지시인 ‘상왈(上曰)’과, 이세백의 말인 ‘이세백왈(李世白曰)’이 계속 되풀이되면서 당시 현장 분위기를 접할 수 있게 한다. 동일한 사안을 기록할 경우 《승정원일기》는 실록의 거의 10배에 해당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음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는 왕과 신하들의 의견 교환에 관한 기록이 특히 자세하며, 왕의 표정 하나 감정 하나까지도 상세히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자주 나타난다. 또한 역대 왕들 스스로가 자신의 병세에 대해 신하들에게 이야기하고 약방이나 의원들에게 자문을 구한 사실과 왕의 기분, 병세 및 왕실의 건강 상태에 대해서도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왕의 언행, 기분 하나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으려 했던 철저한 기록정신. 이것이야말로 세계적으로도 가장 방대한 분량의 기록물 《승정원일기》를 탄생하게 한 근본요인이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은 편찬이 완료된 후 지방의 사고에 보관하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열람을 할 수 없었던 데 비하여 《승정원일기》는 실록보다 내용이 훨씬 상세하고 주요한 전례나 국방, 외교상 현안이 있을 때 전대의 《승정원일기》를 참고하기도 하였다. 《승정원일기》는 역사 기록물이자 현재 정치의 참고자료로 항상 활용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실록》과 서로 보완관계를 지니면서 인조대 이후 조선 후기의 역사를 총람하는 데 필수적인 자료가 된다. 비록 《조선왕조실록》보다는 포괄하는 시기가 광범위하지는 않지만 자세한 내용만큼은 《승정원일기》의 자료적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

 

《승정원일기》에는 매일의 날씨까지 기록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 날씨는 청(晴·맑음), 음(陰·흐림), 우(雨·비), 설(雪·눈) 등 매일의 날씨가 기록되어 있는데 ‘오전청오후설(午前晴午後雪)’ 등 하루 중 일기의 변화까지도 기록하였다. 비가 내린 경우 측우기로 수위를 측정한 결과까지 꼼꼼히 적었다. 《승정원일기》의 날씨 관련 기록은 전통시대 기후연구에 큰 도움을 준다.

 

또한 《승정원일기》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이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손에 의해 집필되어 정사(正史)로서 정통성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 시기 대체 자료로서의 의미도 크다. 1876년 개항 이후에도 조선 왕실의 비서실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이곳에서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승정원일기》는 《일성록》과 함께 《고종실록》이나 《순종실록》이 지니는 한계성을 보완해주는 1차 사료가 되고 있다. 또한 이 시기 《승정원일기》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이라는 격동기에 서구 열강과의 외교관계, 외세 침략에 대응하는 조선왕실의 모습이 자세히 나타나 있어서 한말 대외관계사 연구에도 필수 자료가 될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유산이 총 11건 있다. 해인사 대장경판을 비롯해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 의궤》 《동의보감》 《일성록》 《난중일기》와 새마을운동 기록물,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등이다. 선조들이 남겨준 세계적인 기록물을 제대로 보관하고, 그 가치를 적극 활용해나가야 할 것이다.

 

▲신병주 = 건국대 사학과 교수.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 KBS TV 프로그램 <역사추리> <TV조선왕조실록> <역사스페셜> <불멸의 이순신>의 자문을 맡았으며, 현재 <역사저널, 그날>의 패널로 참여하고 있다. 저서로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등이 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유산’>

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은 전세계 민족의 집단 기록이자 인류의 사상, 발견 및 성과의 진화 기록을 포함한 것이다. 책과 같이 문자로 기록된 것을 비롯하여 지도나 악보, 설계도면처럼 이미지나 기호로 기록된 것, 영화나 사진과 같은 시청각 자료 모두 기록유산으로 분류될 수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세계적 가치가 있는 귀중한 기록물을 가장 적절한 기술을 통해 보존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하여 2년마다 세계적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을 지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직지심체요절》 《승정원일기》 《조선왕조 의궤》 《동의보감》 《일성록》 《난중일기》와 해인사 대장경판, 새마을운동 기록물,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등 11건의 세계기록유산이 있다.   

 

 

 

 

 

 

 

 

 

 

 

 

 

출처 : 화타 윤경재
글쓴이 : 화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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