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 오세영 순결한 자만이 자신을 낮출 수 있다자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은 남을 받아들인다는 것인간은 누구나 가장 낮은 곳에 설 때 사랑을 안다살얼음 에는 겨울추위에 지친 인간은 제각기 자신만의 귀갓길을 서두르는데 왜 눈은 하얗게 하얗게 내려야만 하는가하얗게 하얗게 혼신의 힘을 기울여 바닥을 향해 투신하는 눈, 눈은 낮은 곳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녹을 줄을 안다나와 남이 한데 어울려 졸졸졸 흐르는 겨울물 소리언 마음이 녹은 자만이 사랑을 안다 읽고 싶은 시 04:30:11
폭설, 그 이튿날 / 안도현 눈이 와서,대숲은 모처럼 누었다대숲은 아주 천천히눈이 깔라놓은 구들장 속으로 허리를 들이밀었을 것이다아침해가 떠올라도 자는 척,게으런 척,꿈쩍도 하지 않는 것은밤새 발이 곱은 참새들발가락에 얼음이 다 풀리지 않았기 때문참새들이 재재거리며 대숲을 빠져나간 뒤에대숲은 눈을 툭툭 털고일순간, 벌떡 일어날 것이다 읽고 싶은 시 04:21:24
봄 /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 눈 비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읽고 싶은 시 04:1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