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있음의 흔적 / 이정림

윤소천 2021. 9. 9. 20:10

 

 

 

 

아무에게도 의지 할 곳이 없는 할머니들이

여생을 함께 보내는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그 집 현관을 들어서다가 나는

우연히 벽에 걸린 게시판을 보게 되었다. 거기에는 색종이로

만든 꽃잎들이 한 오십여 장 붙어 있었다그리고

화심花心에는 할머니들의 사진이 꽃술 인양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어느 유치원의 벽에 붙은 원아들의

사진과도 같았다살짝 찡그린 얼굴이 있는가하면 눈을

감은 얼굴무뚝뚝해 보이는 얼굴앞니가 한 개도 없는

입을 활짝 벌리고 웃는 호호백발 할머니의 동안童顔… 

노인들의 사진을 무심히 훑어보다가 나는 한구석에서

얼굴이 없는 꽃잎 몇 개를 발견하였다.

 

 얼굴 없는 꽃잎그것은 본래부터 꽃잎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어제 오늘 사이에 이승을 떠난

할머니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였다. 노인 중에서도

병들고 나이 많은 분들만 기거하는 그 집에서는 이틀에 한 사람

꼴은 세상을 뜬다고 한다. 앓던 할머니가 세상을 등진

날은 웬일인지 집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고 한다. 

누가 그 소식을 일부러 전해준 것도 아닌데,

 그들은 본능적으로 죽음이 다녀간 발소리를

감지해 내기 때문이다.

 

그곳의 노인들은 항상 죽음을 베개 삼아 산다. 

이승에서도 낙다운 낙을 누려 보지 못한 노인들은 저물어

가는 인생의 마지막 고개에서 그들을 벗하여

동행해줄 친구란 죽음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의 소원은

살아생전에  좀 더 안락하기를 바라는 생의 욕심이 아니라

곧 닥쳐올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는 죽음 복이다.

복이라고는 별로 누려보지 못한 이들이 간절히

소원하는 이 죽음복은 살아 있는 사람으로서

갖는 마지막 욕심이다. 

 

그런 발원 끝에 어느 축축한 새벽녘에 혼자

눈을 감으면, 그들이 이승에 있었던 흔적은

무엇으로 남게 될까.임종 지키며

서러워해 줄 자식 하나 없고, 마음 함께

떠나보내며 애통해할 반려도 없으니, 

그들이 세상에 왔다가는 자취란 완전한 빔, 

공백뿐이지 않을까. 그들은 이승이란 꽃 밭

한구석에서 남몰래 피어 있다가 남몰래 스러지는

이름 없는 꽃들이나 같다.

 

 요즈음 내 마음의 꽃밭에도 얼굴

없는 꽃잎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연락이 끊긴 한 친구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소식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또 심성이 착하여 남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외롭고 구차하게 말년을 보내던 어느 노 장군의

부고를 신문에서 보았다.

 

가장 실의에 빠져 있을 때

무료 변론을 맡아 주며 따뜻한 격려로 힘이

되어 주었던,  그 꼿꼿한 몸매의 변호사도 세상을

떴다. 친구는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평범할 정도로

조용한 아이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바람처럼

나타난 한 남자를 따라 종적을 감춘 후로는

사람이 놀랄 만큼 변모되어갔다. 

 

그러던 친구가 어느 구석에서 불쑥

모습을 나타내어 교편을 잡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또

자살이라는 제 부고를 제 손으로 뿌리고 갔다. 

왜 그 친구가 세상을 스스로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이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러나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것은, 그보다는 그 미완의

인생에서나마 그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있음의 흔적'을 무엇으로 남기고 갔을까 하는 점이다. 

 

노장군과 은퇴한 변호사의 부고를

신문에서 보았을 때, 나는 영결식장에 꼭 참석하고 싶었다. 

그만큼 내게 고마운 분들로 자리 잡고 있고, 

더욱 고마운 것은 그런 내 마음을 변치 않게 해 준

그분들의 인격이었다. 결국 마지막 인사를

드리러 가지는 못했으나, 나는 그분들이 생전에 내게

베풀어주신 아름다웠던 인정을

되돌아보면서, 내 마음속의 꽃잎 하나를

떼어내는 허전함을 맛보았다.

 

이젠 내 마음의 꽃밭에도 서서히 가을이

오고 있는 모양이다. 새로 피어나는 꽃보다 지는 꽃이

많아졌고, 새로 돋아나는 잎보다  떨어지는

잎이 많아졌다. 한 철만 피었다가 지는 꽃들도 가을이면

저마다 그들의  '있음의 흔적'을 남기고 간다. 

 

아무리 후미진 구석에서 사람의 눈길 한번

받아 보지 못한 무명초라 해도 가을이 되면 제가 섰던

자리에 씨앗을 떨어뜨린다.  그 한 알의  씨앗은

바로 이듬해에 그 꽃이 거기에 있음을 말해주는 훌륭한

표적이 되지 않는가. 사람도 저마다 자기 생긴 대로,

자기 그릇대로그 '있음의 흔적'을 남기고 간다.

 

 어떤 사람은 명예로, 어떤 사람은 업적으로,

 어떤 사람은 재산으로, 어떤 사람은 사상으로, 그렇다면

나는 내 '있음의 흔적'을 무엇으로 남기게 될까. 

아니 나도 작으나마 내가 이승에 머무르다 갔음을

말해주는 그 무엇을 정녕 남기게 될 수

있을 것인가.

 

나라는 존재는 그 어느 누구의 마음속에서

그래도 한 번쯤은 그리움으로 돌아보는 빈자리로

남겨지게 될까. 아니면 어디에 피었다가

언제 졌는지도 모르게 쓸쓸히 스러져 간 이름 없는

꽃들 중의 하나로만 여겨지게 될 것인가. 

마음에 빈자리가 늘어간다.

 

 그가 있었던 자리와 그가 남기고 가는

흔적,  내가 있었던 자리와 내가 남기고 가는 흔적.

바람이 분다가을도 아닌데누런 고엽이

발밑에 뒹구는 가로수길을 걸으면서, 나도

어느새  '있음의 흔적'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는 나이에 와 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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