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내가 만일 / 박목월

윤소천 2018. 3. 8. 22:12


내가 만일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도마뱀을 따라 꽃밭으로 가 보고

잠자리처럼 연못에서 까불대고

물 위에 뱅글뱅글

글씨를 쓰고

그렇지, 진짜 시(詩)를 쓰지


아침나절에는

이슬처럼 눈을 뜨고

풀밭에서

낮잠을 자고

나무 위에서 노래를 부르고

매미가 되어

숲으로 가지


내가 만일 너라면

따분하게시리

책상 앞에 붙어 있을 줄 알아


책에 쓰인 것은

벽돌 같은 것

차돌 같은 것

그렇지, 살아서 반짝반짝 눈이 빛나는

그런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지


내가 만일 너라면

조잘대는 냇물과 얘기를 하고

풀잎배를 타고

항구로 나가고

무지개가 뿌리 박은

골짜기로 찾아가 보련만


이제 나는

도리가 없다

너무 자라버린 사람이기에

어른은 어른은


참 따분하다

그렇지, 내가 만일 어린 소년이라면

나는 따분하게시리

책만 읽고 있을 줄 알아




'읽고 싶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 오는 봄 / 도종환  (0) 2018.03.24
보름달 / 정호승  (0) 2018.03.16
또 기다리는 편지 / 정호승  (0) 2018.02.22
그 나무에 부치는 노래 / 강은교  (0) 2018.02.14
삶의 맛 / 황동규  (0) 2018.0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