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수필

겨울밤의 얘기 / 노천명

윤소천 2020. 5. 17. 22:37

 

 

 

                                      

"좋아하는 눈 왔어요, 어서 일어나세요."

할멈이 내 창 앞에 와서  이렇게 지껄이는 소리에 얼른

덧문을 열고 내다보니 눈보라가 날리고 있어

 내가 또 싱겁게 좋아했더니 저녁부터 날씨는 갑자기

쌀쌀해지고 말았다. 방이 외풍이 세서 어제 오늘로

부쩍 병풍이 생각나고 방장 만들 궁리를 한다.

시골집의 어머니가 쓰시던 낡은 병풍을 가져올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그 병풍을 치고 내가 홍역을 할 때

밤을 꼬빡 새시며 얼굴에 손이 못 올라가게 지키셨다고

들었다. 지금 그것을 내 방에다 가져다 치고 보면

생각은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시던

우리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불타산 뾰죽한 멧부리들이 둥글게 묻히도록

눈이 와 쌓일라치면 아버지는 친구들과 곧잘 노루 사냥을

떠나셨다. 그래가지고는 그제나 시방이나 몸이 약한

내게 노루피를 먹이려고 하시는 통에 하루에도 몇 차례씩

사랑에 나가 돈을 달라던 내가 온종일 아버지한텔 나가지

못하고 숨어서 상노애더러 아버지한테 가서 돈을 달래

오라고 울고 매달린 적도 있었고 어려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따랐다. 술을 못 하시는 아버지가 늘

사랑에 가 조용히 앉아서 골패를 떼시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골패를 섞는 소리는

왜 그렇게 듣기 좋았는지.

 

 

이렇게 객지 생활을 하고 나이를 차츰

먹고 보니 어머니가 계셨더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다.

늦도록 부모를 모실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행복된

일이다. 헌데 세상 사람이 흔히 부모를 여의고 나서야

어버이가 귀한 줄을 통절히 느낀다는 것은 이 무슨

안타까운 일이랴.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동화 같은 옛일들이

머릿속에 피어오른다. 겨울밤은 길고 내 마음은 구성진데,

비를 머금은 날이 밤새도록 기차 바퀴 소리를 들려 주면 실로

나는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모르고 츠아라리엔더가

 "남녘의 유혹"에서 느낀 것 같은 향수에 내가 한없이

빠져들어간다. 이런 시간이란 어찌 보면 청승스럽게도

보이나, 실은 그 위에 가는 사치가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진실로 잔인하게 나는 이것을 즐긴다. 어떠한

다른 환경을 가져 본다 치더라도, 내 가슴에 지니는 향낭은

없이도 견딜 수 있으나, 일종의 이 '페이소스'가 없이는

견디지 못할 것 같다. 실상 인생 생활에 이 비애가 없다면

도대체 심심해서 어떻게 배겨 내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다 고독을 지니고 다니는 하이칼라는 없는가?

이런 친구를 만난다면 내가 아끼는 신비로운

이 긴 밤들을 그 친구와 함께 화롯가에서  얘기를

뿌리며 밝혀도 좋겠다. 늙은 시계 소리를 들으며

나는 이 밤이 한없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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