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림

[스크랩] 서민 화가 박수근의 작품 세계 / 수채화

윤소천 2015. 11. 17. 09:31

 

박수근(1914-1965)의 삶과 예술은 '서민의 화가'라고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는 곤궁한 시절에 힘겹게 살아갔던 서민화가 그 자체였다.
1914년 강원도 양구 산골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가난 때문에 국민학교밖에 다닐 수 없었다.

6.25동란 중 월남한 그는 부두 노동자,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 따위로 생계를 유지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화가 박수근

gallery |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린 화가

 

“25억. 더 없으십니까? … 서면 응찰 손님께 25억원에 낙찰됐습니다.” 숨 죽여 지켜보던 관중들은 낙찰과 동시에 미술품 경매장을 뜨거운 박수소리로 가득 메웠다.

 

얼마 전 K옥션에서 박수근의 <시장의 여인들>이 국내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며 새 주인을 찾았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 있었던 서울옥션 경매에서도 박수근의 작품은 20억원이란 액수에 낙찰되었다.

 

최근 부동산 시장에 몰렸던 돈이 미술 시장으로 유입되면서 경매 시장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로 인해 경매 시장에서의 박수근은 블루칩 작가로 손꼽힌다. 하지만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서민 화가’라는 지금의 명성과는 달리 그는 혹독한 가난과 힘겨운 삶을 살다간 불운의 화가였다.

작가 박수근(1914~1965)은 개신교 집안의 3남3녀 중 4째로 태어났다. 강원도 양구가 고향인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보통학교를 나온 것이 학력의 전부다. 12세 되던 해 박수근은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림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느끼며 한국의 밀레가 될 것을 결심했다.

 

아버지의 광산업 실패로 삶은 더욱 힘들어져만 갔고 미술교육을 따로 받는다든가 유학을 간다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하지만 당시 교장선생님의 도움으로 그는 독학의 길로 들어섰다.



 

1932년 그의 나이 18세 때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수채화 <봄이 오다>가 입선되면서 화가로서의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빈곤과 궁핍은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힘겨운 삶의 무게가 그를 고통의 시간으로 내몰면 내몰수록 그림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박수근은 제 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부터 연속적으로 여덟 번의 입선을 하게 된다.

 

박수근은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일은 없지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人間象)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즐겨 그린다.” 그가 지향한 소재는 가난한 서민들의 평범한 생활상이었다. 박수근을 흔히 한국적 작가, 서민 작가, 향토 작가 등등으로 칭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화폭에 담겨진 대부분의 소재는 생활에 전념하는 시골 사람들의 꾸밈없는 모습이다.

 

박수근의 모든 작품들은 그가 살아온 시대의 서민적 삶을 사실적이면서도 정감 있게 그려낸 작품들이다. 이는 인물에서 보이는 것뿐만이 아니다.

 

풍경에서 잎이 무성한 나무는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 보이고 있을 뿐이다. 초가나 판잣집도 예외는 아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그 가난한 사람들의 진실한 삶의 내면을 숨김없이 고스란히 담아내려는 작가의 의도에서 기인된 것이다.

 

박수근의 예술이 높이 평가 받는 이유는 서민의 진솔한 삶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도 있겠지만 기법의 독창성을 빼놓을 수 없다.

 

화강암의 표면을 대하는 듯 우둘투둘한 마티에르와 모노톤의 절제된 색채, 단순화된 형태는 서민의 가식적이지 않은 삶과 애환이 듬뿍 묻어나 있다. 이러한 기법들은 그가 작고하기 전 1960년대 초반 무렵에 더욱더 완숙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이들이 극심한 굶주림과 공포에 시달려야만 했다. 박수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박수근은 처음에 미군 CID(범죄 수사대)에 들어가 환경미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미군부대 PX(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물)에서 초상화 그려주는 일로 생계를 유지했다.

 

초상화를 그리는 일은 그다지 예술적인 감각을 요구하진 않았지만 그 일로 생활을 했고, 창신동에 조그마한 집도 하나 장만할 수 있었다. 그 이후 1953년 가을, 제 2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에서 <집>이란 작품으로 특선을 한다. 그리고 박수근은 오로지 그림을 그려서 생활하는 전업 화가가 되었다.

 

1957년 그는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낙선한 후 그 충격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을 때 또 한 번의 기회가 그를 찾아온다. 당시 서울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작은 화랑을 꾸미고 있던 실리아 지머맨, 미국대사관 문정관 부인 마리아 헨더슨 그리고 마가렛 밀러가 박수근을 각별히 주목하고 그의 후원자로 자처한 것이다.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 가난과 고독은 그를 술에 빠지게 만들었다. 계속되던 과음은 끝내 신장과 간을 망가뜨리고, 그로 인해 왼쪽 눈마저 백내장으로 잃게 되었다. 그 후에도 그의 불꽃같은 예술혼은 시들지 않았다. 다음해인 제 13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도 악화되어가는 병마와 싸우면서 제작한 대역작인 <할아버지와 손자>를 출품했는데, 그것이 그의 마지막 국전 참가였다.

 

1965년 그는 결국 간경화가 악화되어 5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말을 남기며 그는 편안히 눈을 감았다.

 

화가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 박수근 생가 터에는 200여 평 규모로 박수근미술관이 건립되어 있다. 따뜻한 봄날 작가의 예술관과 인생관을 느낄 수 있는 그곳으로 한번 가보는 것은 어떨까.

출처 : 한국가톨릭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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