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청준과 어머니
이청준문학의 출발점은 고향, 어머니, 불우한 유년이 뭉쳐진 원죄의식이었다.
어머니는 가난에 치어 집까지 팔았지만 그 사실을 고향에 다니러 온 고교생
이청준에게 숨겼다. 어머니는 주인 허락을 얻어서 내집인양 아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하룻밤 잠을 재워보냈다. 신새벽 눈쌓인 산길을 걸어 아들을 읍내까지
배웅하고 돌아선다. 어머니는 아들의 목소리와 온기가 밴 목소리만 밟고온다.
마을 어귀에 선 어머니는 갈 곳이 없다. 집이 없다.이청준은 어머니의 사연을
십몇년 뒤에야 알게된다. 단편 '눈길'에 쓴 자신의 얘기다. 어머니는 아흔넘겨
치매를 앓았다. 아들이름도 잊은채 "손님 오셨구마,우리집엔 빈방도 많으니께
편히쉬었다 가시게 하곤했다. 시인 정진규는 이 얘기를 '눈물'로 썼다.
1996년 어머니 상을 치른뒤 이청준은 겪은 일화들을 임권택에게 얘기했다.
그 영화가 '축제'다. 이청준은 '내 소설의 기둥은 어머니'라고 했다. "소설을
쓰게 해주는힘과 인연이 어머니에게서 비롯된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청준이
영원히 말리지 못한 젖은 옷 한벌, 그의 정신의 피륙이었다. 그가 어머니에게
돌아갔다. 고인의 소설에서 어미가 어린 아들을 한군데 묶어 놓은채 콩밭을
매던 자리..그 자리에 이젠 모자가 나란히 잠들었습니다
♣ 만물상(8월 1일) : 오태진 님의 글발췌

♧ 이청준 위원을 회상하며
이청준 위원,
당신은 7년넘게 동인상독회의 자리에서 최고의 소설을 뽑기위해 있었습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열심이었습니다. 빠짐없이
챙겨 읽고 꼼꼼이 반추하며 우리 작가들의 특성과 성패를 섬세히 헤아렸지요
그 말씀에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도란도란 속말을
나누는듯 했지요. 책읽는 그자리는 술 익듯 책 익는 마을이었습니다. 선계의
사랑방도 이보다 정겨웠을라구요.하지만 여기가 지상계임을 번번이 일깨운
것도 선학동 나그네,당신입니다. 현실의 냉혹한 법칙들이 태양풍처럼 몰아치
고 있음을 짚었습니다. 또한 그걸 이길수 있는 소중한 자세가 '자존심'임을
넌지시 강조하셨지요. 당신이 치열한 주제의식과 방법적 자각, 그리고 고유한
문체로 작품세게를 완성해 간 우리시대의 뛰어난 작가였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청준 위원,
당신은 작품과 더불어 사람도 남겼습니다. 당신이 남긴 사람의 모습은 유장하
고 온유하고 검질기고 뜨거운 남도(南道)의 정한과 품격으로 우리앞에 계십니
다. 그 정한이 우리를 짠하게 하고 그 품격이 우리를 정(淨)하게 합니다.
그러니 말을 바꿔야겠어요. 당신의 빈자리는 눈부신 흰자리가 되었습니다.
당신은 바닷가로 돌아간 게 아닙니다. 저기 눈길을 따라 삶이라는 고개를 넘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문학이 갈길을 앞장 서 가고 있습니다.
♣ 고인의 빈자리를 되돌아보는 추모의 글(8월11일) - 동인문학상심사위원회

♧ 영화 천년학
영화 '천년학'은 이청준의 '선학동 나그네'가 원작으로 '서편제' 후속편입니다.
1954년 이청준이 고향 장흥을 떠나 도시 중학교로 유학가기 전날 모자는 개펄
로 나갔다. 홀어머니는 몹시 가난했지만 아들을 맡아 줄 친척집에 빈손으로
보낼 순 없어서 모자는 한나절 게를 잡았다. 이튿날 이청준이 긴 버스길 끝에
상한 게들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친척집 누님이 코를 막고 게자루를
쓰레기통에 버렸을 때 자신이 버려진 비참한 마음이었다. 궁색스런 게자루와
거기 함께 버려진 어머니의 정한(情恨)은 이청준의 숨은 삶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어머니에게서 깊은 삶의 비의(悲意)와 문학의 자양(滋養)을 얻었고 많은
것을 깨우쳤다"고 했다. ▶ 가난에 굴복하고 신세타령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가난을 극복하여 꿈을 성취하고 또한 생전, 사후에 존경받는 님들의 공통점
은 배우셨던 그렇지 않던 어머니의 인자, 사랑이 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습니다. 자식교육에 돈을 떡칠함 보다 제 발로 걸어가는 비젼을 심어 줘야
하겠습니다. 특히 사회지도층과 정치인들中 일부 사람들의 빗나간 행태로
손가락질과 비웃음 받음은 돈이 아니라 가정정신에 그 원인있다 생각습니다.
영화,천년학의 주제곡(대금산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