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lica Jar with Branches of Oleander
Oil on canvas August 188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마르호트와의 사랑
1884년 가을, 반 고흐보다 12살이나 많은 이웃집 딸인 마르호트 베게만(Margot Begemann)은
종종 그가 그림 그리는 곳을 따라다녔다. 그녀는 반 고흐를 사랑했다.
열정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보답하기 위해 반 고흐는 결혼을 결심한다.
그러나 두 집안의 반대로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마르호트는 약물 과다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병원으로 옮겨져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된다.
반 고흐가 사귄 여자 중 비교적 참한 여성이었던 마르호트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하여 빈센트를 배신했음에도
반 고흐는 아이 아버지라는 부당한 비난을 받아야했다.
이 사건 이후로 1885년 3월에는 아버지가 심장 발작으로 죽었다.
그는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된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주로 이루어지기 힘들거나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연애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대체로 수치와 망신을 당한 채 끝나 버리고 말지.”
그 후에도 <감자먹는 사람들> 속의 인물 17살의 스틴,
탕부랭 식당 여주인 세카토리,
마지막 사랑인 가셰 박사의 딸 마르그리트까지.....
많은 사람과 사랑을 꿈꾸고, 부분적으로 기쁨을 느끼긴 했지만,
꾸준한 사랑을 얻지 못하고 사랑을 찾아 헤매는 고흐였다.
고흐는 사랑 없이는 살 수 없고, 사랑이 곧 예술의 원천이라 믿었다.
“여자는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는 한 늙지 않는다.”
1874년 7월 31일 런던에서, 테오에게
사랑을 꿈꾸는 그가 동생에게 쓴 편지 의 일부다.
"사랑이란 거미줄처럼 약하단다. 오직 성실함 위에서만 밧줄처럼 강해진다."
거리의 여인 시엔과의 이별 후 테오에게 전한 말이다.
자신의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사랑을 갈망하며 모든 사랑에 헌신적이었지만,
그에게 제대로 된 사랑은 없었다.
자기의 상처와 같은 상처가 있는 사람을 사랑하거나,
오로지 짝사랑뿐인 그는 더욱 절망의 늪에 빠진다.
테오가 부인 요한나에게 보낸 편지 중
“형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았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을....”
하며 애통해 한 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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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sant Man and Woman Planting Potatoes
Oil on canvas April 1885
Kunsthaus Zürich Zürich Switzerland
“밀레나 드 그루 같은 화가들이 "더럽다, 저속하다, 추악하다, 악취가 난다" 등등의
빈정거림에 귀를 기우리지 않고 꾸준히 작업하는 모범을 보였는데,
내가 그런 악평에 흔들린다면 치욕이 될 것이다.
농부를 그리려면 자신이 농부인 것처럼 그려야 한다.
농부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똑같이 느끼고 생각하며 그려야 할 것이다. ”
-1885. 4. 30-
“늙고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들을 묘사하기에 적합한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인물 화가들과 거리를 산책하다가 한 사람에게 시선을 주고 있는데
그들은 "아, 저 지저분한 사람들 좀 봐" "저런 류의 인간들이란"하고 말하더구나.
그런 표현을 화가한테서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
그래 그런 일이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런 장면은 사람들이 가장 진지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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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atfield with Lark
Oil on canvas 1887
54 x 65.5 cm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봄이 되면 종달새는 울지 않을 수 없다.”
반 고흐가 밀밭을 그린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봄과 같은 온화한 느낌을 준다.
밀 줄기는 아직 푸르고 하늘은 은은한 색조를 띠고 있으며, 날아오르는 종달새는
희망과 같은 새로운 삶의 상징처럼 보인다.
부드러운 봄바람으로 일렁이는 봄날의 밀밭 풍경이 사뭇 따뜻하고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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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rmhouse in Provence
Arles
Oil on canvas 1888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USA
“겨울은 눈 속에 깊이 파묻히고, 가을은 낙 엽 속에 파묻히고,
여름은 뜨거운 보리 속에 파묻히고, 봄은 풀 속에 파묻히는 것이야말로 ‘좋은’ 것이야.
여름은 머리 위 하늘과 함께, 겨울은 난로 곁에서,
풀 베는 남자들이나 농가의 처녀들과 함께 있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야.
언제나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러하리라고 느끼는 것은 좋은 것이야.”
-1885년 6월 중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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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wer with Setting Sun (After Millet)
Burlap on canvas November 1888
73.5 x 93 cm
Foundation E.G. Bührle collection Zurich Switzerland
“저는 지혜롭게 일하는 순박한 농부야말로 진정한 문명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도시에서는 정말 뛰어난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만큼 고귀한 사람을 찾아보기가 힘들답니다.
아무래도 분별 있는 사람을 만날 기회는 도시보다 시골이 더 많은 것 같아요.
대도시에 가까이 살면 가까이 살수록 그만큼
사람들은 타락과 어리석음과 사악함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드는 법이지요.”
-1883년 10월-
“진실에 도달하려면 열심히, 오랫동안 일해야 해. 그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정말 힘들게 얻어내려 하는 필생의 목표인 것이야. 하지만 너무 높은 곳은 바라보지 않겠어.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감상적이고 우울한 것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내가 어떻게 비칠까?
보잘것없는 사람, 괴벽스러운 사람, 비위에 맞지 않는 사람...,
사회적 지위도 없고 앞으로도 어떤 사회적 지위를 갖지도 못할,
한마디로 최하 중의 최하급 사람....
그래 좋다. 설령 그 말이 옳다 해도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보여주겠다.”
-188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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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en Wheat Field with Cypress
Saint Rémy
Oil on canvas June 1889
73.5 x 92.5 cm
Narodni Gallery Prague Czechia
“푸른 하늘 아래 노랗고 빨간 꽃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단다.”
“처음으로 사용한 부드러운 기법으로 인해 '밀밭'은
마이어 샤피로의 말처럼 '살아 숨쉬는 작품'이 되었다.
부드러운 기법이란 비단 가늘고 부드러운 붓놀림뿐 아니라,
검은색, 녹색, 빨간색 반점으로 미묘하게 강조된 금색을 말한다.”
맑은 공기, 태양 그리고 봄바람이 가득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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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per
1889 Oil on canvas
73 x92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고흐는 그림 그리는 일을 언제나 ‘일한다, 작업한다, 노동한다.’고 표현했다.
이는 그림을 바라보는 고흐만의 태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노동자나 농민과 다르지 않게 살았음을 뜻한다.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생존에의 본능,
변화에의 본능을 그림에 쏟아 부으며 위대한 유산을 남기곤 간 고흐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이 무력한 단계를 반드시 거쳐야 해.
탐구를 계속해 나가다보면 스스로 이런 열정의 흔적과 시행착오를 발견하게 돼.
그것은 사람들이 바라는 평온함과 거리가 멀지.
평온하게 살고 싶다면 이런 삶은 버겁게 느껴질 것이야.
이 탐구는 소화불량을 일으키기도 하고, 때로 동요, 불안, 과도한 흥분상태에 빠지게 해.
또 마치 여름 폭풍우를 맞는 것처럼 숨도 막혀.”
-1883년 2월 8일-
그림그리기를 시작한 때의 이 초기 편지에서 보듯
그는 언제나 삶 앞에 열정과 진지한 탐구로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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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단어를 이보다 더 잘 정의한 말은 아직 듣지 못했구나.
'예술은 자연에 인간을 더한 것이다.'
자연, 현실, 진실,... 하지만 실상 중요한 것은 예술가가 자연 안에서
찾아내는 개념이나 특징이겠지.
거기에 적당한 표현을 찾아 주고, 원래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예술가의 일일거야.
예술가는 감정과 해석, 개성을 끄집어내고 표현하며, 분출시키고,
뒤섞으며, 해방시키고, 빛나게 한다.”
-1879년 6월-
“자연에 완전히 흡수된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발휘해
그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게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사명이란다.”
-1882년 7-
“나는 자연을 연구한단다.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이성을 잃지 않기 위해서지.
하지만 내 그림의 색이 실제 대상의 색과 같은지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고 있어.
캔버스 위에서 아름답게 보이기만 한다면, 자연에서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기만 한다면 말이야.”
-1885년 10월-
Vincent's House in Arles The Yellow House
Oil on canvas 1888.9.
72.0 x 91.5 c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Rijksmuseu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푸른 하늘 아래 노랗고 빨간 꽃들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어.
이곳의 맑은 공기에는 북쪽의 공기와는 다른, 좀 더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감도는구나.
마치 네가 가지고 있는 몽티셀리의 꽃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울림이야.
나는 이곳에서 꽃을 그리지 않았던 자신을 원망했단다.
아, 들판에는 사랑스럽고 큼지막한 프로방스 장미가 있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자라고 있어.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한 편의 시라고 해도 좋을 것 가구나.
햇볕은 끊임없이 내리쬐고, 그런데도 식물들은 싱싱한 초록빛을 잃지 않고 있단다.”
-1888년 9월-
고흐가 아를의 ‘노란 집’으로 옮겨와서의 편지이다.
작업하기에 좋게 햇빛이 잘 들었던 집으로
찬란한 노란색을 얻기 위해 여름 내내 취해 있었다는 고흐.
고갱과의 생활을 위해 프라스 라마르틴이라는 집의 한쪽에 세를 들어
“외벽은 노란색으로 칠하고 초록색 덧문이 달린 창으로는
아카시아 나무 등 푸른 나무로 가득한 공원이 보이고
내부는 완전 흰색으로 칠했는데 바닥은 붉은 타일을 깔았지요.
무엇보다 멋진 건 푸른 하늘! 그 아래의 아름다운 집으로
여기서 정말 내가 평안 속에 살면서 작품구상도 하고... 그림도 그릴 것입니다.”
고갱에게 보낸 편지로서 매우 흡족해 하던 집이다.
그리고 고갱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유명한 '해바라기' 연작을 이 집에서 그렸다.
또한 고흐는 이 집을 화가들이 교제 장소로도 쓰면 좋겠다고 생각해 집 안팎을 꾸몄다.
그리하여 그의 정성이 깃든 이 집은 고흐의 마음의 평화를 찾는 상징의 집이 되었고
1888년 5월부터 1889년 4월까지 살았던 곳이다.
“코발트 색의 하늘, 태양의 숨결 속에 자리 잡은 집이나 그 가까운 곳... 이 모티브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기필코 나는 그것을 쓸 만한 것을 해보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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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elve Sunflowers in a Vase
Oil on canvas August 1888
Bayerische Staatsgemäldesammlungen Neue Pinakothek Munich Germary
“고갱과 함께 우리들의 작업실에서 살게 된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쁘다.
그래서 작업실을 멋지게 장식하고 싶어.
오직 커다란 해바라기로만 말이다. 열두 점 정도의 그림을 그려야 해.
그 그림을 모두 모아놓으면 파란색과 노란색의 심포니를 이루겠지.
매일 아침 해가 뜨자마자 그림을 그리고 있어.
꽃은 빨리 시들어버리는데다, 단번에 전체를 그려야 하기 때문이야.”
고흐는 고갱을 맞을 기쁨으로 1888년 여름에 몰두했던 '진노랑의 색조'에 대해 말하고 있다.
거의 노란색으로만 그린 해바라기 연작 다섯 점이 바로 그 색조를 강력히 보여준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그 효과는 대단하다.
<네 송이의 해바리기>와는 달리 고흐는 해바라기를 이루는 기본적인 색들만을 사용했는데
이 그림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색은 노란색이다.
고흐는 노란색의 여러 가지 채도를 이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황금이라도 녹여 버릴 것 같은 열기, 해바라기의 그 느낌을 다시 얻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
온통 거기에만 집중해서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
-188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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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 with House and Laborer
<Paysage avec une maison et un laboureur>
Oil on canvas 1889
33 x 41.4 cm
Collection of Otto Krebs Holzdorf
Now in the Hermitage St. Petersburg Russia
1881년부터 생을 마감한 1890년 까지 약 900점의 유화와 1100여 점 이상의
스케치와 드로잉등 총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을 뿐 아니라
빈센트 반 고흐가 생전에 남긴 편지는 모두 827통이다.
그중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668통으로
황야의 외딴 영혼으로 살다 간 37년의 짧은 생애 동안 남긴 그림과 편지들이다.
처절하기 그지없는 사랑과 광기의 나날로 가득 찬 삶을 치열하게 살아온 반 고흐.
그 수많은 편지에서는, ‘창조적 광기’의 신화와는 아주 동떨어진 모습의 반 고흐를 볼 수 있다.
편지는 대부분 뜨거운 태양 아래서 또는 태풍 속에서 그림을 그린 뒤,
집에 돌아와 녹초가 된 상태에서 밤 늦게 까지 쓴 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미처 보여 주지 못한 진실한 내면, 정신적 고뇌,
예술에 대한 열정 등 내면의 독백은 하나하나가 촘촘하게 잘 짜진 진솔한 문학작품 같다.
평생을 통해 끊임없는 대화를 나눈 빈센트와 테오,
그 중 대부분은 말 그대로 동생이면서 친구이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후원자요
영혼의 동반자이자 피난처였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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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 Cypresses
Saint-Rémy
Oil on canvas June 1889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1889년 고흐는 반복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면서
그 해 5월 생 레미(Aaint Remy)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찾아가 입원했다.
하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멈출 수 없었던 그는
그곳에서 감시원을 동행한 채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가 생 레미에서 발견한 중요한
모티브는 병원에서 바라보이는 밀밭과 싸이프러스 나무였다.
밭이나 산을 배경으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싸이프러스 나무는
그에게 있어서 마음의 번민에 위안을 주는 희망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는 이 모티브로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싸이프러스 나무와 함께 격렬하게
소용돌이치는 듯한 붓터치를 이용한 표현은 이 시기 작품의 특징을 이룬다.
반고흐는 비평가 알베라 오리에(Albert Aurier)에게
이 모티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기도 했다.
“싸이프러스 나무는 시골 풍경의 전형입니다. 해바라기에 필적할 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와는 전혀 반대되는 이미지로 나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이지요.”
실제로 해바라기가 아를에 머물던 시기의 그가 느꼈던 심적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면,
싸이프러스는 생 레미 시기의 그의 심리를 대변하는 매개체이다.
이 작품 속에서는 산도, 하늘도, 대지도, 모든 요소들이
살아서 꿈틀대는 사이프러스 나무에 맞추어 호흡하고 요동치는 것처럼 보인다.
불타오르는 듯한 격렬한 붓질로 그려진 나무와 무성하게 갈린 들판의 풀, 휘몰아치는 하늘 등
각각의 요소가 나름대로의 강렬함을 띄고 있으면서도
반 고흐의 억제된 색조 표현을 통하여 지극히 조용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고흐역시 이 작품을 매우 아꼈으며 ‘내가 그린 가장 명석한 작품’이라며 스스로 평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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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ll-Knight Café at Arles
Oil on canvas September 1888
Yale University Art Gallery New Haven CT USA
고흐와 고갱이 자주 가서 압상트를 즐기던 카페 드 라 가르 (Cafe de la Gare)이다.
“카페는 사람들이 자신을 파괴할 수 있고 미칠 수도 있으며,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해.
'밤의 카페'를 통해 그런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어.
부드러운 분홍색을 핏빛 혹은 와인 빛 도는 붉은색과 대비해서,
평범한 선술집이 갖는 창백한 유황빛의 음울한 힘과
용광로 같은 ‘인간의 끔찍한 열정’을 표현하고 싶어 지옥 같은 분위기를 부각하려 했지.”
-1888. 9. 8-
의도적으로 피와 같은 붉은 색과 어두운 노란 색, 당구대의 초록색‘등을 대조적으로 사용했다.
‘색채는 열렬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관적인 그의 견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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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rlésienne Madame Ginoux with Books
Oil on canvas November 1888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USA
고흐는 늘 고뇌하였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서,
살아가고 물감을 살 돈이 없어서, 동생에게 짐이 되는 죄스러움을 갚을 길이 없어서...
그래서 그의 영혼은 늘 가난했고 늘 주눅이 들어 있었다.
고흐는 자신이 늘 동생에게 신세져야 한다는 사실을 미안해했다.
언젠가 좋은 값에 그림이 팔려 테오에게 진 빚을 다 돌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의 편지에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의 표현은 늘 빠지지 않았다.
편지에서 고흐는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을 ‘내 영혼을 줄게’라는 표현으로 전했다.
고흐의 그림은 고흐의 영혼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테오는 형을 존경했고, 늘 걱정했고, 형의 그림을 사랑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에 감사했고, 여유롭진 않았지만 돈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내 영혼을 줄게.“
“형과 나는 몸은 둘이지만 한사람이야. 형은 정신이고, 나는 육체라구.”
한편의 드라마 같은 짧은 인생을 살다 간 그의 형제들의 고통과 번민에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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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ll-Knight Café at Arles (Portrait of Madame Ginoux)
1890
Paul Gauguin 作
고흐와 고갱은 지누 부인(드 라가르 카페 주인)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 그림으로 그들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고흐는 탁자에 몇 권의 책이 펼쳐진 우아한 지누 부인을 그리지만,
고갱은 싸구려 술 압생트 병과 술잔이 놓여있고 뒤에는 고흐가 아버지처럼 좋아하고 따르는
우체부 룰랭이 창녀들을 희롱하는 모습을 그렸다.
술에 취해 탁자에 쓰러져 있는 사람은 종종 그림을 같이 그리는 고흐의 친구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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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Oil on canvas January 1889
60 x 49 cm
Courtauld Institute Galleries London UK
고흐는 자해 사건 이후 귀에 붕대를 감은 자신의 모습을 두 점의 자화상에 담았다.
그 중 하나인 이 그림은 다른 것에 비해 더 미묘하고 성찰적인 느낌이다.
발병 후 2주가 지나 그린 이 그림은 차분하고도 기품 있는 고흐의 이미지를 담고 있다.
강한 빛 아래서 자신과 침착하게 대면하고 있는 고흐는 그가 아직 훌륭하게 살아 있음을 주장하는 듯하다.
이 이미지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신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화가이기 때문에 겪은 발작이었기를 바란다. 하루하루 내 머리는 평온을 회복하고 있다."
테오에게 이렇게 썼지만
실은 그의 불운의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고흐가 귀를 잘랐던 사건-
고흐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갱이기에
비용을 절감하고 작품 구상의 의논생대로도 좋을 것 같아
당시 같이 춥고 배고팠던 고갱에게 함께 기거하기를 고흐의 여러 번의 요청 끝에
드디어 10월 고갱이 아를에 도착했다.
가난했지만 마흔 살 고갱과 서른다섯 고흐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고 서로를 아껴주었다.
몽펠리에로 파브르 미술관에서 쿠르베, 들라크루아의 소장품을 함께 감상하기도 하고
야외로 그림을 그리러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생활은 성격적인 충돌로 오래가지 못했다.
서로를 지배하고픈 욕망과 자신의 예술성을 라이벌에게 과시하고픈 욕망,
고흐의 격한 분출 등... 예술에 관해 의견이 달랐던 그들은 격렬하게 논쟁하기 시작했고,
반 고흐는 자신이 그토록 좋아하는 고갱이 그를 버릴 것만 같은 공포감에 점점 휩싸였다.
1888년 12월 23일 실의의 빠진 반 고흐는 날카롭게 고갱과 대립했다.
패닉에 빠진 반 고흐는 호텔을 떠나 창녀촌으로 달아났고,
왼쪽 귀를 잘라 휴지에 감싼 다음 레이첼(Rachel)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면서
“이 오브제를 잘 보관하라”고 부탁까지 했다.
한 편, 고갱은 그길로 아를을 떠났고 다시는 반 고흐를 보지 않았다.
‘노란 집’에서 같이 지낸지 약 두 달 만이었다.
동생 테오가 고갱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입원한 형을 방문했다.
1889년 1월, 화가 폴 시냑이 방문해
반 고흐가 다시 ‘노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잦은 환각과 발작, 망상으로 병원과 집을 번갈아 다녀야 했다.
30명의 마을 사람들은 반 고흐를 ‘빨간 머리의 정신병자’라고 부르면서
탄원서를 제출했고 경찰은 그의 집을 폐쇄했다.
그 사건 이후 반 고흐는 반복되는 극심한 정신 착란으로
1889년 4월 스스로 생 레미(Saint-Remy) 지방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찾아가 입원하게 된다.
37년간의 짧은 삶 속에 힘겹던 그를 지탱해주던 두 축이었던 고갱과 테오.
177통의 편지에서 고갱의 이름이 605번이나 언급될 정도로 고갱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고흐였다.
동료 예술가로서 존경하고 마음이 맞는 구세주이자
스승이며 형과 같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고갱과의 불화는
고흐를 거의 회복이 불가능한 고통의 깊은 수렁에 빠트렸으며
자기 귀를 자르는 극단적인 사건으로 비화했다.
이것이 그의 삶에 있어서 최초의 발작이었다.
그의 짧은 인생의 참담한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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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레미 정신병원의 병실
1889. 4
“이곳으로 오길 잘한 것 같다. 동물원 같은 곳에 갇힌 미친 사람들의 생활을 직접 보노라면,
막연한 불안이나 공포가 사라진다.
그러면서 정신병도 다른 질병과 같은 병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1889-
1889년 4월말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고흐는 프로방스의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 찾아가 스스로 입원하여
1년 남짓 병원의 빗장이 쳐진 독방에서 격리된 생활을 하며
감사자와의 동행 하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
빈센트 형에게
“형이 생 레미에 무사히 잘 도착했다니, 그리고 아를에서보다 더 편 안한 느낌이라니 정말 기뻐.
하지만 형이 그곳에 너무 오래 머물지는 않길 원해.
주변에 그렇게 많은 정신이상자들이 있는 게 그리 유쾌하진 않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건 형의 생활을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서
한편으로 형을 자유롭게 해주는 곳을 찾는 거야.”
-1889. 5. 22 테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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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Man in Sorrow
Oil on canvas 1890.5.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이곳 환경이 나를 말할 수 없을 만큼 짓누르기 시작했어.
이런, 어느새 참고 지낸 지도 일 년이 다됐구나. 신선한 공기가 필요해.
여긴 너무나 지루하고 슬픈 곳이란다. … 비록 마음에서 우러나와 따뜻하게 보살펴 준다 해도
다른 사람의 감시를 받으며 산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삶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것 같구나.
자유를 희생하고 스스로를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그리고 아무런 방해 없이 작품에 몰두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는 상태야. 이곳에서 시간을 너무 낭비했다.”
-1890년 5월-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감금되어 있을 때 비참한 심정으로 쓴 편지다.
테오에게 부탁하여 1890년 5월 고흐는 생 레미의 병원에서 나와
가셰 박사가 있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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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eet in Auvers-sur-Oise
Oil on canvas 1890
73 x 92 cm
Museun of Finnsh Art Ateneum
“오베르는 무척 아름답단다. 그중에서도 요즘에는 보기 드문 오래 된 초가가 그렇지. …
거기에는 정말로 심오한 아름다움이 있어.
이런 곳이야말로 진정한 시골이라 할 수 있을 거야. 매우 특색 있고 회화적이거든.”
-1890년 5월-
병원에서 퇴원하고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와서 느낀
새롭고 경이로운 풍경에 대한 편지다.
“그림에 대해 좌절하지 않는 정열이 있고
자연의 색에 대한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면 말일세.
수많은 난관이 닥치더라도 예술가는 이곳에서 버틸 수가 있다네.
난 좀 더 오래 머물 생각이야.”
“자연은 처음에는 언제나 화가의 접근에 저항을 하지.
하지만 자연을 정말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화가라면
그 정도의 저항에 쉽게 물러서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그런 저항이야말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겠니?
그리고 자연과 진정한 화가는 그 근본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이란다.
확실히 자연은 '손에 잡히지 않는' 대상이지만 그래도 화가는 자연을 움켜쥐어야 해.
그것도 아주 단단히 말이야. 그렇게 한바탕 씨름을 하고 나면
이제 자연도 조금 유순해지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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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ur Cut Sunflowers
Oil on canvas August-September 1887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고흐의 상징이자 태양의 상징, 태양과 노란 색에 미쳐버린 화가 반 고흐.
1888년 동생 테오(Theodorus van gogh 1857-1890)에 보낸 편지의 내용 중
"자냉(Goerges Jeannine)에게 작약이 있고 쿠스트(Ernest Quost)에게 접시꽃이 있다면
나에게는 해바라기가 있다."
그가 얼마큼 이 꽃에 매료되어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1888년부터 아를(Arles)의 작업실에서 해바라기 연작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 연작은 훗날 그에게 ‘태양의 화가’라는 호칭을 안겨 주었다.
1888년에 제작된 <해바라기>는 생명력이 넘치며
마치 태양을 쫒아 절규하는 듯한 노란색으로 표현 되었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향한 자신의 봉사와 고통이 부족하다고 울던 고흐가
몇 년 만에 파리에서 가장 시끄럽고 난잡한 술집에 앉아
신을 저주하는 사람들과 밤새도록 어울리던 시기로 압생트에 과하게 취한 시기이기도 하다.
압상트에 취하듯 노란 색에 미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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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use in Auvers-sur-Oise
Oil on canvas 1890
72 x 60.5 cm
Boston Museum of Fine Arts USA
“저는 계속 고독하게 살아갈 것 같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도 망원경을 통해 희미하게 바라보는 수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격렬한 색채, 맹렬한 붓질과 몇 번씩 덧바른 물감, 소용돌이,
고통과 불안, 외로움 등 빈센트의 내면의 고뇌에 찬 삶의 통찰을 나타내는 이 모든 것이
그의 그림을 통하여 가슴 뭉클한 정신적, 심리적 메시지를 전한다.
“그래, 나의 그림, 그것을 위해 나는 나의 목숨을 걸었고 이성까지도 반쯤 파묻었다.”
다시 정신적 고통으로 힘들어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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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rises
Sait-Rémy
Oil on canvas May 1889
J.Paul Getty Museum Malibu CA USA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의 그림이다.
해바라기, 아이리스, 히아신스, 체리블로섬, 아카시아, 들장미, 아네모네… 등
수많은 꽃들을 모델로 삼았던 고흐는 자연과의 끊임없는 씨름 후에,
태양을 의지해서 자라나는 꽃들과 자연을 연인처럼 사랑했다.
고흐는 표면적으론 삶에 대해 부정으로 일관하는 사람 같았지만,
사실 그 속엔 누구보다도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는 진지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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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Dr. Gachet Seated at a Table Auvers-sur-Oise
Oil on canvas June 1890
67 x 56 cm
Collection Ryoei Saito Tokyo Japan
정신병의 전문 의사였던 가셰 박사는 아마츄어 화가이기도 하면서
폴 세잔을 비롯한 많은 화가들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다.
피사로의 추천으로 반 고호를 돌보게 되었는데 나중엔
반 고흐를 이해하는 좋은 친구가 되었던 인물이다.
“이제 가셰 박사를 빼고는 나를 지켜 주는 것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구나.
그만은 계속 내 친구이리라 생각한단다. 그의 집에 갈 때는 그림이 그렇게 나쁘지 않아.
앞으로도 매주 일요일이나 월요일에는 박사가 나를 불러 줄 것 같구나.”
-1890년 6월-
또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던 가셰 박사는 흥분하기 쉬운 성격이었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고흐는 이따금 둘 중 누가 더 심하게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걸려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인지 생각하기도 해서
테오에게 “가세박사는 나보다 더 아픈 것 같애....”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가셰 박사를 모델로 그는 한 심약하고 선량한 사람의 인상으로 뛰어난 초상화를 남겼다.
이 <Dr. Gachet 의 초상화>는 그의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다.
그 이유는 빈센트 생애 마지막 즈음에 그렸고,
그 주제가 오늘날까지 Controversy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How competent was doctor Gachet?
What did Vincent mean When he wrote to Theo?
" First of all, he is sicker than I am. I think, or Shall we say just as much? "
또한 가셰 박사의 딸 마르그리트는 고흐의 마지막 사랑이기도 하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혹되어 작업에 매진하고
정서적 안정을 찾아가던 고흐는
자신의 주치의의자 친구로서 신뢰했던 가셰 박사에게 거절당하자
또다시 광기에 사로잡히고 만다.
예술가로서 고흐를 높이 샀던 가셰 박사였지만 자기 딸 마르그리트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고 생활 능력이 없는 고흐와
가까워지는 것을 그대로 둘 수 없었던 것이다.
자신의 딸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의사 가셰와 심하게 다툰 후,
가셰의 집과 자기 숙소 사이에 있는 밀밭에서 권총으로 자해하고
그 이틀 뒤 그의 불행했던 삶을 마감한다.
이 작품은 1990년 5월 미국의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에서
경매 시작 3분 만에 8,250만달러(한화792억원)에 낙찰됐다.
구매자는 일본의 제지업자 료에이 사이또로 알려져 있다.
이 작품을 통해 고흐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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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set at Willow
-1888. 8-
“어쩌면 지금 형을 보면 못 알아보실 지도 모르겠네요.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저보다도 다른 사람들이 더 놀라곤 한답니다.
위가 너무 안 좋아서 위를 거의 못쓰게 되면서는 큰 수술을 받았어요.
의사 말로는 이제 완전히 나았다고 하네요. 형의 그림은 굉장한 속도로 발전하고 있답니다.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지요.
아직 돈을 받고 그림을 팔지는 않지만 다른 화가의 그림과 맞바꾸는 일은 종종 있어요.
그런 식으로 괜찮은 작품들도 꽤 모았는데, 물론 모두 상당히 가치 있는 작품이랍니다.
한 미술상은 형의 그림을 네 점이나 가져갔는데 내년에는
형의 전시회를 열어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요즘은 주로 꽃 그림을 그리고 있답니다.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좀더 생기 넘치는 색상을 표현해 보려 하고 있지요.
예전보다 훨씬 더 활기차졌고
이곳 사람들 역시 형을 좋아해요. 매일 유명한 화가의 작업실을 방문하기도 하고
그 사람들이 형을 찾아오기도 한답니다. 어떤 사람은
그림의 소재가 될 꽃을 매주 보내주기까지 해요.
그런 사람들이 계속 있는 한 이제 형에게도 힘든 시절은 다 지나갔다고 할 수 있겠지요.
앞으로는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흐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 쓴 테오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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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 with Man Walking, Carrige, Cypress, Star and Crescend Moon
Auvers-sur-Oise
Oil on canvas May 1890
Rijksmuseum Kröller-Müller Otterlo Netherlands
“최근에는 옆으로 별 하나가 보이는 사이프러스나무 그림을 그리고 있네.
눈에 뜨일락 말락 이제 겨우 조금 차오른 초생 달이 어두운 땅에서 솟아난 듯 떠 있는 밤하늘,
그 군청색 하늘 위로 구름이 흘러가고, 그 사이로 과장된 광채로 반짝이는 별 하나가 떠 있지.
분홍색과 초록의 부드러운 반짝임이야.
아래쪽에는 키 큰 노란색 갈대들이 늘어선 길이 보이고 갈대 뒤에는
파란색의 나지막한 산이 있지.
오래된 시골 여관에서는 창으로 오렌지 색 불빛이 새어나오고,
키가 무척 큰 사이프러스나무가 꼿꼿하게 서 있네.
길에는 하얀 말이 묶여 있는 노란색 마차가 서 있고, 갈 길이 저물어 서성거리는 나그네의 모습도 보인다네.
아주 낭만적이고 프로방스 냄새가 많이 나는 풍경이지.”
-1890. 6-
고흐는 프로방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그린 마지막 작품 중의 하나인 이 그림을
유명한 비평가 알베르 오리에르에게 선물로 주었다.
알베르는 [르 메르퀴르 드 프랑스] 지에 고흐에 관한 최초의 진지한 기사를 써서
그에게 많은 용기를 주었다.
"그는 위대한 화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술과 팔레트, 자신의 성격에 스스로 황홀해지는,
상상과 환상 속에 사는 광신적인 신봉가이다."
반 고흐의 전 생애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인 단 한 번의 논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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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at Field under Clouded Sky
Oil on canvas 1890
100.5 x 50 cm
Vincent van Gogh, Amsterdam, the Netherlands
“건강을 위하여 뜰에서 제작을 하고, 꽃이 피는 것을 보기도 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다와 같은 넓은 언덕을 향하여 펼쳐져 가는 보리밭의 그림에 지금 열중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3점의 대작의 하나로, 이것도 어두운 폭풍 속에 있는 밀밭이다.
“저는 완전히 이 밀밭의 대작에 소모당하고 있습니다”
라고 그는 어머니에게 써 보내고 있었다.
그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이 작품은 색채 면에서 '까마귀가 있는 밀밭'만큼 불길해 보이지 않지만,
무서운 공백감은 불길 이상의 종언의 예고와도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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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Vineyards of Arles
Oil on canvas 1888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 Moscow Russia
1888년 2월 반 고흐는 무절제 했던 파리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프로방스(Provence)거쳐 아를로 떠났다.
맑은 하늘아래 그의 영혼과 예술 사이에 또 다른 교감이 시작되고
그곳의 따뜻한 태양아래에서 내면의 빛을 되찾게 되었다.
이 작품은 1888년 폴 고갱과 함께 생활하며 아를의 야외에서 그린 작품이다.
‘비가 내린 뒤 석양이 땅을 보라색으로 바꾸고
포도 잎을 와인처럼 붉게 물들일 때 그린 것이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테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선물한 그림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그가 생전에 그린 1500여 점의 그림 중에서
테오가 단 400프랑에 팔았던 유일한 작품이다.
테오는 이 작품을 1890년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20인 전에 출품했는데,
그 때 반 고흐와 친분을 쌓고 있었던 시인 외젠 보흐의 누이이자
벨기에 인상주의 여류화가인 안나 보흐가 구입했다.
이후 이작품은 한 러시아 사업가를 통해 러시아 정부가 소유하게 되었으며
현재는 모스크바의 푸슈킨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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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atfield with Crows
Oil on canvas July 1890
50.5 x 103 cm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고흐가 자살하기 전 그린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로 죽음의 공포와 그에 반한 삶의 의지를 그린 것이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와서는 새로운 시도로
가로로 긴 캔바스에 그려 밀밭의 광활함을 강조했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그렸으나
Wheat Field under Clouded Sky 그림의 평온함과는 상반된 심리상태를 보인다.
고흐의 그림은 항상 자신의 내면을 적극적으로 표출하는 세상을 향한 소통의 매개체였다.
다만 세상으로부터 적절한 응답을 못 들었을 뿐...
“그것은 폭풍의 하늘에 휘감긴 밀밭의 전경을 그린 것으로
나는 깊은 슬픔과 극도의 고독을 표현하려고 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전경의 세 갈래의 갈림길은
자살 직전 그의 절망감을 강하게 상징하는 듯하다.
, 대지가 폭풍 속에서 바다처럼 사납게 일렁이는 여기에선
요동치듯 거칠고 절박한 붓질로 그려진 어둡고 낮은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 떼,
불안한 화면을 통하여 그는 영혼의 혼란과 고독, 슬픔을 절규하고 있다.
“앞날의 예감도 어둡다. 나는 미래를 행복한 빛 속에서 보는 것은 전혀 되지 않는다.”
끝없는 절망감은 그를 못견디게 했다.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산이 드문 나라이다.
어디를 바라보나 까마득한 지평선 끝까지 파란 논밭이 이어져 있다.
군데군데 집과 풍차와 숲이 흩어져 있고, 강물이 언제나 은빛으로 반짝이고 있다.
그런 지평선 끝에 빨갛게 타는 저녁 해가 하늘을 온통 핏빛으로 물들이고
조용히 가라앉으려는 순간이었다.
“야, 저것 좀 봐라! 얼마나 아름다우냐?”
풀밭에서 공차기를 하며 놀고 있던 대 여섯 명의 어린이 중 한 아이가 외쳤다.
“어쩌면 저녁 해가 저렇게 빨갈까?”
공기가 맑은 탓인지 오늘따라 저녁 해가 유난히도 아름답게 보였다.
어린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말했다.
“정말 아름답구나!”
“피보다 더 빨갛지?”
그러자 아까부터 숨을 죽이고 뚫어지게 저녁 해를 바라보고 있던 한 아이가,
“틀려, 저건 빨강 빛이 아니고 노랑 빛이야.”하고 나섰다.
“뭐? 노랑 빛깔이라고? 네 눈엔 저게 노랗게 보이니?”
여러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그 아이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보이는 게 다 뭐냐? 정말 빛깔이 노랑인데...”
“뭐라고? 저건 누가보든지 빨강빛깔이야. 그렇지 얘들아?”
“응, 그렇고말고. 저건 빨강이야.”
어린이들은 모두 빨강 빛깔이라고 말했다.
“네 눈이 좀 이상한 모양이구나.”
“이상한 건 내가 아니고 너희들이야. 그래서 너희들은 정말 빛깔을 보지 못하고 있어.”
저녁 해를 노랑빛깔이라고 우겨대는 그 어린이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저녁놀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어린이가 바로 뒷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된 빈센트 반 고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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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는 네델란드의 어느 가난하고 엄격한 목사의 집에서 칠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불행했던 인생은, 자기가 태어나기 일 년 전에 죽었던 형으로 부터 시작한다.
자신보다 1년 전에 태어난 형이 사망한 뒤 태어난 고흐는
어머니로부터 대체된 아이라는 느낌을 매번 받아야 했다.
사망한 형의 이름까지 물려받은 고흐는 일요일마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묘지를 봐야했고,
어머니에게 죽은 형의 존재를 뛰어넘는 사랑을 바랬지만, 형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진지하고 조용하고 생각이 깊었던 반 고흐는 성격이 점점 어두워졌다.
가난으로 인해 열다섯 살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 두고
목사이던 아버지를 따라 성직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제도화된 종교 사회에서의 이면의 그늘을 받아들일 수 없어
목사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 후 삼촌의 도움으로 구필 앤 씨(Goupil & Cie)에 일자리를 얻어
아트 딜러로 런던에서 일을 한 적도 있다.
그의 종교적 열성은 계속되어 신학공부를 위해 평 선교사로
잠간 동안 석탄 광산마을에서 광부들과 기숙하며 선교활동을 하기도 한다.
브뤼셀에 있는 로열 아카데미 오브 아트에서 그림공부를 하면서
그림만이 구원의 길이라 생각하여
그림을 통해 하느님에게 봉사하기를 원했고, 하느님에게 인도하는 화가가 되기를 바랐다.
선생의 지도도 없이 독학과 독습으로 땅을 일구는 농부처럼 그림을 그려 나간다.
적은 돈, 적은 힘일지라도 온통 독서와 그림에 쏟아 붓는다.
“끓어오르는 내면의 불길, 어떻게 분출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나는 억지로 그 불길을 다잡고 있다.”
첫 주요 작품이 그 유명한 <Potato-Eaters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그때부터 동생 테오의 재정적 도움을 받으며 서신왕래와 함께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열성적으로 많은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 하지만 지속되는 가난함과
미래에 대한 어두운 현실은 결국 그에게 우울증이라는 정신장애를 가져다주었다.
1986년 파리로 옮겨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면서 인상파의 아름다운 색채와
화려한 일본 미술을 접하게 되고 그것이 그의 화려하고 밝은 색채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고갱, 쇠라, 피사로 등..인상파 작가들과 전시도 하면서 활발한 교류도 하지만
무절제한 파리생활에 지친 고흐는
1888년 2월 그동안 그린 20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난다.
아를에서의 활기찬 밝은 햇살과 풍경은 과한 음주와 흡연으로 쇠약해진 그를
흥분시키며 색깔은 점점 강열하고 밝아졌다.
고흐는 ‘노란 집’에 세 들어 고갱을 기다리며 유명한 ‘해바라기’를 연작으로 그린다.
고갱과 같이 지내며 예술에 관한 견해차이로 격렬하게 논쟁이 시작되어
마침내 귀를 자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갱은 같이 기거한지 두 달 만에 떠났고
그 충격으로 환각과 망상에 시달리다가 생 레미(Saint-Remy) 지방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스스로 찾아가 입원을 했다.
1년 남짓 정신병원에 고립 되어 있으면서 그의 작품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포함해
소용돌이치는 특징으로 강렬한 색과 결합되어 감정을 더욱 격렬하게 표현한다.
더욱 열정적으로 꿈틀거리는 듯한 선은 별의 광채를 한층 두드러지게 하고
사이프러스와 올리브 나무의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한 곳이다.
1890년 5월, 반 고흐는 정신병원을 떠나 파리 근교의 오베르(Auvers-sur-Oise)의
닥터 가셰(Paul Gachet) 가까이 옮겼다.
그곳에서 가셰 박사의 깊은 이해로 마음의 안정을 갖는 듯 했으나 얼마가지 못했다.
비록 그가 전 인생에 걸쳐 정신적인 병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그의 마지막 몇 년 동안 이러한 고통은 더욱 심각해져갔다.
능력의 절정에서 예술가의 좌절이 더해진 결과 그 당시 그의 심리 상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고,
오베르로 온지 두 달 만에 반 고흐는 37세인 1890년 7월27일에
밀밭으로 가득한 들로 뛰쳐나가 가슴에 리볼버를 당겼다.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오후,
마을 위로 누런 밀밭의 대기가 한방의 총소리로 흩어질 때 아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 사나이는 서른일곱 살의 빈센트 반 고흐였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았고 얼마나 치명적인 상태인지 알지 못한 채 라부 여인숙으로 돌아와
이틀 뒤 동생 테오가 바라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많이 아프고 짧았던 비운의 삶, 그는 그렇게 갔다!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다.”
“La tristesse durera toujours(고통은 영원하다, The sadness will last forever)”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불멸의 화가이자 현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렘브란트 이후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 화가로 인정받고 있으며
인상주의, 야수파, 추상주의, 표현주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고흐다.
불꽃같은 정열과 격렬한 필치로 눈부신 색채를 표현했으며,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
불과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자살까지 몰고 간 아픈 영혼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서른일곱 해의 짧은 생을 살면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늘 고독했던 그는
노동자와 농민 등 하층민의 모습과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소박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고,
영혼을 담아 그림을 완성했던 그는 그림을 통해서만 말을 할 수 있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종교적인 신념,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고흐의 삶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독과 가난 속에서 온전히 예술을 위해 바쳐졌다.
“예술은, 사람의 영혼에서 솟아나오는 것”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창조하고 행동하는 것”
완전히 자신을 던져버린 채 작업을 했다. 영혼을 다해 그림을 그린 것이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고뇌와 열정의 강열한 랩소디이다.
그러나 정작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에야
그의 작품들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고, 삶은 신화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