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시

불 빛 / 정호승

윤소천 2014. 1. 25. 07:35

 

 

 

 

 

 

 때때로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처음엔 어두운 터널 끝에서 차차 밝아오다가

 

터널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확 밝아오는 불빛처럼

 

과거에 환하게 불이 켜질 때가 있다

 

특히 어두운 과거의 불행이 환하게 불이 켜져

 

온 언덕을 뒤덮는 복숭아꽃처럼 불행이 눈부실 때가 있다

 

봄밤의 거리에 내걸린 초파일 연등처럼

 

내 과거의 불행에 붉은 등불에 걸릴 때

 

  그 등불에 눈물의 달빛이 반짝일 때

 

나는 밤의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잠시 고개를 숙인다

 

멀리 수평선을 오가는 배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기 위해

 

등대가 환히 불을 밝히는 것처럼

 

오늘 내 과거의 불행의 등불이 빛난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살아갈수록 후회해야 할 일보다 감사해야 할 일이 더 많아

 

언젠가 만났던 과거불(過去佛)의 미소인가

 

불행의 등불을 들고 길을 걸으면 인생이 다 환하다

 

 

 

 

 

'읽고 싶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멸에게 / 정호승  (0) 2014.01.27
자작나무 / 도종환  (0) 2014.01.26
나무 / 도종환  (0) 2014.01.23
이 세상에서 제일로 좋은 것 / 서정주  (0) 2013.12.23
선정(禪定) / 구상  (0) 2013.1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