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7

관상觀想 휴가 / 박노해

장마 전에 난 정말 바쁘다감자알을 캐고 블루베리를 따고 오이를 따 소금에 절이고 별목련과 팥배나무를 캐다 심고 정원의 꽃나무들 가지치기를 하고수로를 파 물길을 내주고 나면 나의 7월은 끝, 휴가다  나의 여름휴가는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관상觀想 휴가 문 앞에 “묵언 중입니다. 방문 사절. 미안.” 팻말을 내걸고 전화기도 뉴스도 끊고 테라스에 집필 책상과 의자를 치우고 낮고 편안한 의자를 놓고 기대앉아 묵연히 앞산을 바라보다 구름을 바라보다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걸 지켜보고 불볕에 이글거리는 들녘을 바라보다가  느닷없는 천둥번개와 빗금 쳐 쏟아지는 빗줄기에 한순간 세계가 변하는 서늘한 기운에 잠깐 우수수 하다가 겹겹진 구름 사이로 태양빛이 쏟아지며 커다란 무지개가 갈라진 세계를 잇는 ..

읽고 싶은 시 2024.07.16

삶에 대한 감사 / 박노해

​  하늘은 나에게 영웅의 면모를 주지 않으셨다그만한 키와 그만한 외모처럼 그만한 겸손을 지니고 살으라고 ​하늘은 나에게 고귀한 집안을 주지 않으셨다힘없고 가난한 자의 존엄으로 세계의 약자들을 빛내며 살아가라고 ​하늘은 나에게 신통력을 주지 않으셨다상처 받고 쓰러지고 깨어지면서 스스로 깨쳐가며 길이 되라고 ​하늘은 나에게 위대한 스승도 주지 않으셨다노동하는 민초들 속에서 지혜를 구하고 최후까지 정진하는 배움의 사람이 되라고 ​하늘은 나에게 희생과 노력으로 이루어낸 내 작은 성취마저 허물어 버리셨다낡은 것을 버리고 나날이 새로와지라고 ​하늘은 나에게 사람들이 탐낼만한 그 어떤 것도 주지 않으셨지만그 모든 씨앗이 담긴 삶을 다 주셨으니 무력한 사랑 하나 내게 주신 내 삶에 대한 감사를 바칩니다

읽고 싶은 시 2024.07.08